남겨진 소리

6 화 - 다섯째 날 — 첫사랑의 목소리

by 나리솔


다섯째 날 — 첫사랑의 목소리



책의 다섯 번째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첫사랑에게 말해. 그날의 침묵을 후회한다고.”


나는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듯 가슴이 저릿했다.

첫사랑—그 단어는 마치 봉인된 서랍처럼, 열면 안 될 추억들을 쏟아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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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의 그녀


그녀의 이름은 하린이었다.

고등학교 도서관 창가,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

햇살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면 그녀의 머리카락은 물빛처럼 빛났고,

나는 괜히 자주 책을 빌리러 갔다.


“또 왔네?”

그녀가 웃으며 건네던 말투는 늘 가볍지만, 내 마음을 흔드는 데 충분했다.


우리는 함께 과제를 하고, 교정을 걸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 나는 침묵했다.


늦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오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때.

하린은 망설이며 내게 물었다.

“혹시… 나, 좋아해?”


나는 분명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너무 어린 겁쟁이였다.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아니, 그냥 친구지.”

그 한마디가 모든 것을 끝냈다.

그녀의 미소는 사라졌고,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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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거리


그 후로 수년이 흘렀다.

나는 다른 길을 걸었고, 그녀는 소식이 끊겼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를 통해 들은 소식—외국으로 이민 갔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벤치에서의 그 침묵은 내 안에서 아직도 살아 있었다.


오늘 책은 그 침묵을 다시 꺼내 들며 나를 시험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SNS를 열었다.

검색창에 ‘하린’이라는 이름을 입력하자, 수많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오래 전의 눈빛과 닮은 사진을 발견했다.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제는 내 곁에 없는 사람.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다가 결국 메시지 창을 열었다.


“하린아, 나야.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때 하지 못한 말이 있어. 늦었지만 전하고 싶어.”


손가락이 멈췄다. 전송 버튼은 눌리지 않았다.

그녀의 지금 삶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휴대폰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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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향하다


대신 발걸음이 나를 오래된 학교로 데려갔다.

폐교된 건 아니었지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운동장 한쪽의 벤치 하나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 벤치에 앉자,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나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하린아, 늦었지만 말할게. 그날… 널 좋아했어. 하지만 두려워서 침묵했어. 그 침묵을… 지금까지 후회했어.”


말이 허공에 흩어졌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가벼워졌다.

누군가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마침내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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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했다.

첫사랑은 끝나도, 그 기억은 우리를 만든다.

우리가 말하지 못한 순간들, 삼킨 고백들은 결국 우리 안에 남아 삶을 흔든다.

그리고 언젠가, 이렇게 늦게라도 꺼내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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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자, 다섯 번째 문장이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형제에게 말해. 너도 외로웠다고.”


나는 책을 가만히 닫았다.

이번에는 가족보다 더 가까운, 그러나 말하지 못했던 존재가 떠올랐다.

혈육이지만 말하지 못한 감정—

여섯째 날은 그 상처를 건드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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