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성화가 등불처럼

비유의 달인이 되기까지

by 유호현 작가

나는 4.6킬로그램 우량아로 태어났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내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사람이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가 힘들게 출산하는 장면을 보며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도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으셨다. 코피가 터지고 이러다 죽겠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한다.


헬라어에 '휘포모네'라는 단어가 있다.

'휘포'-아래에

'모네'-머물다


직역하면 무거운 것 아래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즉 무게를 견디되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다.

이건 무지성 버티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견디되 그 안에서 의미를 붙드는 악력이다.

흙이 가마에서 1300도 이상의 고열을 견디면 걸작인 '자기'가 된다.

엄마들은 자녀를 낳기 위해 그처럼 불같은 고통을 견딘다.


당연히 엄마는 내가 훌륭히 자라주길 바라셨다. 그래서 1981년 강제로 쫓겨나기 전까지, 책장을 채우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 수는 어림잡아 300권은 넘었다.

아버지는 책 따위에 돈을 쓴다며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불도 기꺼이 견디셨다. 어떤 때는 책을 또 살까봐 생활비를 끊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책을 구해주려 했다. 어려운 책은 누나를 위해, 쉬운 책은 나를 위해.

엄마는 결국 쫓겨났지만, 나에게 해밍웨이와 펄벅 그리고 수많은 무명 작가들을 룸메이트로 남겨두셨다. 공모전용으로 쓴 단편소설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살았다]에 등장하는 책들은 실제로 그 시절 내 방에 있던 것들이다.


계모는 10년 이상 우리와 지내며 단 한 번도 책을 사준 적이 없다. 그 흔한 참고서 하나 없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꽤 잘 살았음에도 말이다.

그녀는 "공부해"라고 말할 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방 안에 갇혀있긴 했지만 공부는 커녕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처음 몇 년간은 숨이 막힐 듯한 지겨움을 견뎠다.

그러다 문득 책이라도 읽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노벨문학상 받은 어려운 책들은 당시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심지어 옛날 성경처럼 세로 줄이라 읽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다가가기 쉬운 책들부터 공략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읽었던 책을 또 읽고, 장면을 연필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말 이후의 이야기들을 창작했다.

예를 들어 플랜더스의 개에서 네로가 '내가 왜 죽어야 해!' 라고 절규한다. 이후 성당에 걸린 루벤스 그림을 비싼 값에 팔아 부자가 된 네로의 복수 이야기. 파트라슈는 애니매이션 명견 실버의 동료가 되어 붉은 곰을 사냥하러 떠났다? 그 밖에도, 어린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으로 수없이 많은 결말을 다시 썼다.

어쨌든 엄마가 견뎠던 불이 나를 책으로 이끌었고, 나는 그 책 속에서 나만의 불을 견디며 성장했다.


브런치에도 자신만의 불을 견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수많은 글들을 정독해서 읽어보며 진심어린 감탄을 하는 순간이 하루 평균 열 번은 넘는다.

모든 작가분들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무렵 비유를 잘 쓴다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 비유의 달인, 언어의 연금술사 등 많은 작가분들이 들어보셨을 별명을 나도 들은 덕분에 글을 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초등학생 시절, 그 불 같은 시련에서 얻어진 것이다. 내가 그때 잠만 자거나 낙서나 하고 있었다면 그냥 무의미한 버팀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의 나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나만의 휘포모네를 하고 있었다. 의미를 붙들고, 고통을 끌어안고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맙고 기특한 꼬맹이에게 오늘 처음으로 박수를 쳤다.


엄마는 나를 낳을 때 생명의 무게를 견디셨고, 나에게 책을 사주기 위해 생계의 무게를 견디셨다.

두 번의 불을 견디신 것이다.

그 불은 휘포모네를 통과하며 단순한 고통을 넘어서게 되었다. 엄마가 견뎌낸 그 불은, 휘포모네를 지나며 단순한 고통을 넘어서 누군가에게 이어질 수 있는 빛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나에게 성화를 건네셨다. 그 성화는 관중의 박수도, 성대한 조명도 없이 작은 방 안 책장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성화는 이제 나에게 등불이 되었다.

불은 두 얼굴이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나를 태우지만, 견디며 의미를 붙잡으면 나를 빚는다.

이제 나는 그 등불 하나 들고 누군가의 긴 밤을 조용히 밝히고 싶다.



엄마의성화.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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