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숨결
와인의 숨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7,900원 에어레이터를 통해 병 속에 갇혀 있던 와인이 탈출할 때 들을 수 있었다.
뽀르르르르륵.
공기와 닿으며 해방의 숨결이 터져 나온다.
에어레이터는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감옥을 빠져나오던 그 희망의 통로 같다. 거길 지나 빗속에서 환호할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더 멋진 것은 에어링으로 인해 와인의 향이 공기를 떠다닐 때다. 마치 꽃잎이 열리듯 향기가 풀려난다.
우리 부부는 첫 모금을 하기 전 불멍처럼 이 향을 바라본다. 이 향기로움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라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게 만든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100년 전쟁의 주요 배경이었던 아키텐 공국의 와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오늘날 이 와인은 보르도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내는 베르사유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 이야기를 한다. 언젠가 꼭 베르사유 궁전을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아내가 말했다.
"프랑스에 온 것 같아."
그렇게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부드러운 첫 모금을 마시며 생각했다.
우리에게 이 '에어링'이라는 단어는 와인의 숨결이란 향이 될 것이고 언제고 프랑스행 티켓이 될 것임을.
와인은 끝모금까지 감탄을 연발하게 할 정도로 맛있었다.
그런데 다 마시고보니 칠레 와인이었다.
미안하다 칠레여.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통해 과거의 기억으로 여행을 한다.
특정한 냄새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일.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한다.
단어에도 냄새가 있다.
예를 들어 나에게 '멍게'라는 단어는 엄마 냄새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엄마 앞에서 사춘기 아들은 화장실 간다는 말을 부끄러워했다.
그렇게 엄마가 낯설었다.
1990년대는 멍게 파는 트럭이 많았었다. 멍게는 어떤 맛일까?
"어머니. 멍게가 맛있어요?"
엄마는 놀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멍게를 한 번도 안 먹어봤어?"
"네."
"얼마나 맛있는데! 잠깐 기다려. 사 올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을 맛 보여주기 전 그 기미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설레는가?
엄마는 그걸 제대로 즐기셨다. 신발도 신는 둥 마는 둥 달려 나가 사 오셨다.
멍게를 초장에 살짝 찍어 내 입에 넣어주셨다. 기대로 인해 엄마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그 흐물흐물한 모양이며 낯선 냄새에 달큼한 뒷맛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만 그때의 내 입맛에는 안 맞았다. 그게 표 났나 보다.
“별로니?”
“음. 네. 생각했던 맛이 아니네요.”
"...아 이걸 어쩌지. 누나 올 때까지 기다리면 상할 텐데."
'어머니. 냉장고에 넣어두면 안 상하겠죠' 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멍게 킬러인 엄마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으셨나 보다.
가난한 집 엄마의 중압감을 내려놓은 우리 양여사는 탑급 먹방러였다. 남은 멍게를 얼마나 맛있게 드시던지.
그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내 가슴이 콩닥거릴 정도다. 우리 엄마는 먹방 유튜브를 했으면 대성했을 사람이다. 엄마가 순식간에 비운 접시를 보며 좀 억울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그리고 엄마가 쫓겨날 때의 모습이 하나도 기억에 없는데, 묘하게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맛있어해 주길 바라던 그 기대 어린 눈빛.
드디어 내가 계모를 벗어나 엄마를 다시 만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위해 달려나갈 엄마가 있구나.
내가 맛있어하면 엄마도 행복하구나.
이것이 엄마 냄새구나.
엄마의 에어링은 내 안에 오래 눌려 있던 감정을 천천히 숨 쉬게 해 주었다.
뽀르르르르륵.
비록 더뎠지만 탁했던 기억이 날아가고 그 자리엔 향긋한 추억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내가 그 눈길을 대신한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행복한 눈길로 바라봐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제2의 엄마가 되어준 누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예가체프 원두와 직접 담근 수정과를 선물해 줄 때면 딱 엄마 눈길이다.
결국 내가 '멍게'라는 단어의 냄새를 잊어버리지 않은 것은 그 눈길들 덕분이다.
이런 에어링을 즐길 수 있다니 난 축복받은 사람이다.
프랑스는 돈과 시간이 있으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행복했던 과거로의 여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단어의 냄새가 그 티켓이 되어준다니...
참 멋진 일이다.
에어링된 와인은 숨을 쉬었고 그 숨결의 냄새를 타고 멍게 앞 반짝이던 엄마의 눈을 향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멍게와 와인은 결국 하나의 기억 안에서 마주 앉았다.
와인의 향은 프랑스를 떠돌다 끝내 엄마라는 나라에 도착했다.
내 기억의 엄마는 늘 울고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멍게를 게눈 감추듯 다 먹고 뻘쭘했는지 함박웃음을 터트리던 엄마의 모습.
그 미소가 내 삶을 또 에어링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