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物質)의 바다에서 물질한다
"대구에서 제일 큰 아파트를 사준다."
다시 돌아온 엄마에게 아버지가 한 약속이다.
그때 우리 집은 전기세를 못 내서 전기가 끊겼었다. 촛불 잔치도 아닌데 눈물처럼 떨어지는 촛농을 보며 그런 약속을 하니 얼마나 폼 나지 않던지.
그런 상황이면 보통의 가장들은 힘든 일이라도 해서 가족 부양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무한동력 보일러라는 전대미문의 발명품을 만들러 서울로 떠나셨다. 후에는 베트남과 보일러가 무슨 상관인지 뜬금없이 비행기를 타시더니 1년 후에 돌아오셨다. 베트남의 뜨거운 기온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하고 공부 잘한 사람이 누나다. 누나는 아버지가 제일 큰 아파트 타령할 때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아버지가 다시는 부자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아버지는 6년 동안 매일 아침 6:30에 누나를 차로 등교시켜 주었다. 참고서 하나 안 사줘도 전교 1등을 밥먹듯이 해오는 누나를 자랑스러워했고 둘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누나는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치명적인 단점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돈이 많아진 아버지는 어머니를 다시 탑 속 라푼젤로 만들어버리고, 많은 여자들을 만나러 다닐 것임을 확신했다.
다행히 가난한 아버지로 살게 해 달라는 누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돈은 물질(物質)이다.
그런데 해녀가 잠수하여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도 '물질'이라 한다.
많은 가장들은 가족 부양을 위해 물질(物質)이란 바다에서 '물질'한다.
며칠 전 친구와 커피 한잔을 했다. 코로나 기간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절망하고 있었는데 아기가 생기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 그 친구가 돈을 버는 목적은 '사랑'하는 가족 부양이다. 자녀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번쩍 난다는 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물질(物質)이란 바다에서 잠수해야 할 시간과 숨쉬기 위해 올라와야 할 타이밍을 정확히 안다. 그 친구에게 물질은 수단이다. 목표는 가족의 웃음이다. 수단을 위해 목표를 희생하지 않는다.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아버지의 '물질'은 물질(物質)이 목표였다. 엄마가 아닌 여자들을 기쁘게 해 줄 물질(物質). 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자들 중 장례식에 모습을 보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의 '물질'은 제대로 실패했다. 덕분에 아버지는 나에게 1원도 물려줄 수 없었다. 나로선 큰 축복이었다.
돈이 많은 젊은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 없는 노년의 아버지는 멋진 노신사였다.
우리 부부는 저녁쯤이면 농담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년에 이사 갈 우리 집 보고 올까?"
즉 신천 둔치에 운동 가자는 말이다. 내년에 이사 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데 그 집이란 것이 매일 바뀐다. 어느 날은 수성구 아파트였다가 어떤 날은 전원주택이 된다. 그랬다가 지금 사는 집이 좋다고 그러기도 하고. 수시로 바뀐다.
지금 하는 일들의 약간의 동기가 되는 것. 그것이 상상 속 '내년에 이사 갈 집'들의 역할이다.
상황이 돼서 큰 집에 이사 간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징검다리 중 하나의 돌일 뿐이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다.
내가 아내에게 뻔뻔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실패를 안 봤으면 나도 엉망이었을지도. 아버지한테 감사하쇼."
아내가 코웃음 쳤다.
"그럼 내가 결혼해 줬겠니?"
역시 아내는 현명하다.
우리는 운동한 것이 무색하게 한우 늑간을 5만 원 치 사서 구워 먹었다.
아침에는 샐러드와 익힌 토마토, 삶은 계란, 견과류 등 건강식을 매일 챙겨 먹는다. 크지 않은 집이지만 계절마다 따뜻하게, 시원하게 살아간다.
은인들에게 신세를 갚으며,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우린 누구의 탑에도 갇히지 않았고, 서로를 위해 물질하지만 숨 쉬는 법을 잊지 않았다.
부자가 아니지만 신천을 걷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내년에 이사 갈 집은 유동적이다.
우린 무한동력 보일러는 갖지 못했지만 작은 불 하나로 서로를 덥힐 줄 아는 사이다.
그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어쩌면 무한동력은 실제 존재할지도 모른다.
저희 뒷모습 아닙니다. 무료사진 퍼왔어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