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뭉티기와 소수육

날 것의 조리 온도는?

by 유호현 작가

나는 대구 10미라 불리는 음식 중 소고기의 날 것인 뭉티기를 특별히 좋아한다.

대구 왕거미 식당


이 음식을 드시고 싶다면 꼭 평일에 오시라.

토요일에 파는 곳도 간혹 있지만 보통의 경우 일요일은 먹을 수 없다.

일요일에는 도축을 하지 않기 때문

일요일에 먹을 수 없다는 말은 섭섭함보다 믿음으로 다가온다.

뭉티기는 반드시 신선하다는 것!

개인적으로 소주 안주 베스트를 꼽자면 단연 뭉티기다.

이건 많은 안주가 필요 없다. 그냥 빨간 고기를 특유의 장에 듬뿍 찍어 먹으면 소주 도둑이다.

중간에 놓인 빨간 뭉티기 접시, 그건 화로 같다. 아내와 난 은은한 불을 즐기며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한다.

대구 사람들은 왜 뭉티기를 좋아할까?

원초적인 육즙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뭉티기를 보며 화로를 떠올린 것처럼 그 안에 담긴 솔직한 뜨거움이 좋아서일까?


뭉티기만큼 좋아하는 음식은 소수육이다.

대구 강산면옥 본점

수육은 시간으로 조리된 음식이다. 날 것이 될 뻔했던 나와 닮은 음식이다. 나도 시간이 조리해 주었다.

이전에 언급했듯, 엄마와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난 익혀졌다. 결국 지금의 나는 수육에 가까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절제된 육향처럼 선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고 부드러운 식감처럼 누구에게나 융화되려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지 않는 부위가 있었다. 언제쯤 나는 완전히 익혀질런지.

하지만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지금의 나는 친한 지인들에게 친절한 사람이라 불리고 있다.


지금의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막내 외삼촌. 외삼촌은 늘 내게 날것을 건네왔다. 착한 분인데 말의 수위를 잘 조절 못했다.

명절에 엄마 옆에만 앉아있다고 '엄마 젖이 아직도 그립니?'라고 묻는 것이었다. 본인은 농담이라고 했겠지만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이건 대표적인 사례고 그 외에도 날것 그대로의 많은 말들로 깊은 상처를 주었다. 명절 때면 막내 삼촌 피해 다니느라 바빴다.


나는 삼촌의 말에 늘 데이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 새벽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고작 고등학생이었다. 슬펐지만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것은 눈물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와 재회한 지 5년이 되지 않았던 나였다. 엄마는 여전히 낯설었다. 10년 넘게 떨어져 지낸 우리였기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엄마는 엉망진창이었던 나를 교육시킨다고 수많은 잔소리를 하셨다. 난 어느 순간부터 반항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고마운 마음보다 섭섭한 감정이 더 컸다.

'내가 보고 싶었다면서 왜 저러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강박감은 더 눈물을 마르게 했다.


그 와중에 막내 외삼촌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의 반응을 예측했다.

'내가 이런데 삼촌은 더 그러겠지?'

이 고약하고 불효한 상상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

삼촌은 시신을 덮은 병원 담요를 내리고 누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울음은 '엉엉엉' '흑흑흑'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울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삼촌은 울음조차 날 것이었다.


그 날 것이, 세상 어떤 불보다 뜨겁게 나를 데웠다.

데었던 내가 데워지는 순간이었다.


난 비로소 울 수 있었다.


삼촌의 울음이 전하는 것 같았다.


네 어머니는 잘 살았다.

내게 자랑스러운 누나였다.

그러니 언젠가,

너는 나보다 더 울게 될 거다.


'날 것'의 전도(傳導)였다.

난 삼촌처럼 날 것으로 울지는 못하지만, 더 오래 울고 있다.


작년 삼촌이 투병 끝에 60대 중반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삼촌과 뭉티기 한 접시에 소주 한 잔 못 기울인 것이 후회스럽다. 그런데 내가 엄마보다 오빠가 되었다고 그 '날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은 자신이 없다.


그래도.

그럼에도.

그때의 날 것의 울음이 아직도 나를 익히고 있다.


keyword
이전 19화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