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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같은 추억

서울 뚝배기. 대구 뚝배기.

by 유호현 작가

1990년에서 1991년, 서울뚝배기라는 웰메이드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평일 저녁 8:25에 시작해서 9시쯤 끝난 것으로 기억한다.

내 할머니의 이름은 김순금. 순금 할매가 가장 좋아하던 드라마였다.


1990년 계모가 도망갔고 91년에는 아버지 공장 부도가 났다. 시골에서 평생 살던 할머니는 날 돌보기 위해 도시로 오셨다. 2년 정도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할머니는 저녁 8시쯤 회전의자에 앉아 스르르 잠이 드셨다. 나는 서울뚝배기보다 더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8시 25분이 다가오면 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하지만 70년 이상 단련된 생체 시계는 대단했다. 정확히 8:24에 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뚝배기, 뚝배기!" 라며.

다른 모든 것은 손자에게 양보해도 뚝배기만큼은 한 발 물러섬이 없었다. 어떤 설득과 회유도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온갖 모략과 술수가 난무했다.

그대로 주무시라며 8시 10분부터 내가 보던 프로그램의 볼륨을 줄였다.

때론 자장가도 불러드렸다. 이미 자고 있는 사람에게 말이다. 그럼 숙면가???

어느 날은 피곤하셨는지 8:45에 깨어나셨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나를 노려보시며 락커처럼 일갈하셨다.

"뚝배기!!!"

그건 지금식으로 해석하자면 '뚝배기(머리) 깨지고 싶냐?'라는 의미이다.

참 교육을 당한 나는 할머니를 꼬박꼬박 깨워드리는 착한 손자가 되었다.


할머니가 이른 저녁부터 피곤을 느낀 것은 노령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지난주는 황금 같은 휴가 기간. 난 세상 어느 곳보다 여길 와보고 싶었다.



내가 중학생 때 살던 아파트 입구 계단.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가는데 저 계단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부추를 팔고 있었는데 날 알아보고는 "이제 오나?"라고 반가워하셨다. 난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못 들은 척 얼른 지나갔다. 이후로도 저 계단을 피해 다녔다.

그런데 할머니는 부추 판 돈으로 반찬을 해주셨고, 꼬박꼬박 용돈도 챙겨주셨다. 내가 외면한 것에 대해 아무 꾸중도 없으셨다.


34년 만에 방문한 저 계단. 그날 온도가 35도. 그늘이 약간 졌다지만 뜨거웠다. 저 자리에 잠깐 앉아보았다가 기겁을 했다. 뚝배기처럼 뜨거웠기 때문.

서울뚝배기는 1991년 7월에 종영을 했다. 7월도 뜨거웠을 텐데, 할머니는 아래로는 지열을, 위로는 자외선을 견디며 날 부양하셨던 것이다. 그러니깐 저 계단은 적어도 나 개인에겐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계단보다 더 역사적인 곳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저 계단을 오르내리며 할머니의 내리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건 할머니의 이름처럼 '순금' 같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섭섭함을 뒤로 한채, 매일같이 웃으며 용돈과 도시락을 챙겨주셨던 것이다. 할머니와의 많은 추억들은 이 시기에 쌓였다.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순금 할매와의 추억조차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조부모에게 사랑받는 손자는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내 감정의 한 부분은 빈곤을 겪고 있었겠지.

이 시기는 내 인생의 황금기 중 하나다.


할머니는 유럽 역사의 황금기라는 벨에포크가 끝나고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에 태어나셨다.

양차 세계대전과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까지 겪은 백전노장과 리모컨 전쟁을 했다니!

참 가소롭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 참 의미 있었다.

그 황금기의 순도는 순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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