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개비가 또 다른 따개비에게

그 손들이 나를 빚어주었다

by 유호현 작가

6년 전, 혈액암으로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그분은 내가 아는 최고의 ‘딸바보’ 셨다.

내가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갔을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나보다 더 사랑해 주게.”


내 손을 무려 10분 동안 잡고 계셨다.

그 손의 악력이 아직도 느껴질 정도다.

우리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 지 100일이 되기 하루 전, 장인어른이 대봉 홍시를 같이 따러가자고 하셨다.

그리고 차 안에서 나에게 돈을 쥐어주며 부탁하셨다.

“내가 돈 주었다는 것을 모르게 하고, 꽃을 사주고 근사한 곳에 가서 식사하게. 강요는 아니지만 꽃은 100송이가 좋겠어.”


난 작년에서야 아내에게 이 말을 해주었다.

장인어른 바람처럼 늘 행복하게만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이 언제나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결혼 첫해는 부부싸움도 자주 했다.

타인과 감정적으로 소란스러운 시기들도 지나왔다.

그리고 5년 전 난 생전 처음으로 극도의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숨이 안 쉬어지고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어지러움이 몰려오는 것이었다.

‘혹시 뇌졸중?’

그 순간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아내였다.

병수발을 감당하기에 그녀는 아직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아주 침착하게 구급차를 불렀다.

그리고 내 손을 꼭 붙잡고 계속 말해주었다.


“괜찮아. 여보.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난 그 무서운 와중에도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아내는 정말 겁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난 종종 장난으로 묻곤 했다.


“여보는 겁 많지?”


그럼 아내는 늘 “응”이라고 대답했고 난 그게 참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이토록 침착하다니.

그동안 내숭 떨었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병원 가서 여러 검사를 받은 후, 뇌졸중이 아니라 급체(...)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제야 아내는 어깨를 떨며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다.

역시나 아내는 겁이 났던 것이다.

역시나.

아내는 내가 구급차에 실려갈 때도, 병원에서도 오래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아내의 부드러웠던 악력도 지금까지 느껴진다.


결혼 생활 17년 차, 우리는 지금도 서로의 끈질긴 악력을 느끼며 살아간다.

밖에서 같이 걸을 때도, 내가 운전을 하다 신호를 받았을 때도, 혹은 버스를 타고 동성로를 갈 때도 손을 잡는다.

직장에서도 자주 연락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카톡을 주고받고, 점심시간이면 음소거된 화상통화로 서로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가끔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찾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봉봉이!"라고 부른다.

저녁식사는 거의 매일 함께 한다.

친구들과의 모임도 부부 동반으로 계획한다.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저녁은 무언가 하루가 덜 채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난 어린 시절 계모 밑에서 크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손을 오래 붙잡는 법도, 감정을 표현하는 법도 몰랐다.

아마 장인어른도 내가 100일을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선수를 치셨나 보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손이, 아내의 손이, 그 손들이 나를 천천히 빚어주었다.


히브리어에는 아주 아름다운 단어가 있다.

‘헤세드’

그건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사랑이다.

마치 따개비처럼 고착하는 사랑.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손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

난 우리 결혼 생활에서 그 단어의 기원을 생각해 보게 된다.


사진은 결혼식날 딸과 입장하는 장인어른의 손이다.

장인어른은 딸의 손을 나한테 넘겨주고 안아주셨다.

오랜 헤세드가 막 시작된 헤세드에게 접착력을 나눠주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굿모닝 대신 "사랑해!"를 외치지만 이 사진을 보니 아직 장인어른을 따라가려면 멀었구나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지고 싶지는 않다.

난 결국에는 지구 역사상 가장 고집스러운 따개비가 될 것이다.


사랑이란, 단단히 고착하는 마음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수없는 파도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것.

힘들었던 시간들이 그냥 지나갔다면, 그저 아픈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붙들어준 사람, 사랑이라는 1.

1억 수표가 있다면 가장 중요한 자리는 어디일까?

수많은 0도 맨 앞의 1이 없다면 가치는 0원이다.

1이 제자리에 위치해 있을 때, 0은 비로소 1을 수식하는 값진 자리가 된다.

그리고 그 1의 이름은 바로 헤세드다.

헤세드는 있어야 할 자리에 확고하게 붙어 있는 사랑이다.

그래서 헤세드의 다른 이름은 따개비인 것 같다.

그 모든 시간 경제적 부담도, 감정의 소용돌이도, 건강 문제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값진 기억이 되었다.

그 아픔들과 흔들림은 우리가 선택한 헤세드를 중심으로 하나씩 의미 있는 자리에 놓인 0들이 되었다.

그 1이 있었기에, 우리 인생의 모든 고통은 시간을 수식하는 숫자가 되었고, 잊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감사하게 껴안을 수 있는 기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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