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와 혁명』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이유

예소연 『그 개와 혁명』리뷰와 에피소드

by 서은

며칠 전만 해도 무에가 아쉬운지 퍼뜩퍼뜩 눈발이 날리더니, 오늘은 싸다귀를 올려붙이듯 거센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급기야 떨어진 나뭇잎들은 바람이 이끄는 데로 후다닥 종종걸음을 치며 몰려다닌다.

봄 날씨 변덕은 늘 계획에 없는지라 봄바람이 불어도 나는 산행을 준비한다.

특히나 어제처럼 육체적으로 피곤했던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산행은 무척이나 진심이 되는 게, 뻐근했던 몸도 풀릴 것이고, 무엇보다 현실을 잊게 하는 마음씨 고운 산 공기가 그리워서이다. 이럴 때 산행은 베일 듯 날 선 마음을 다정하게 잡아주고, 잃어버린 균형을 잡기도 좋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중턱을 오르는데, 인부 5~6명이 등산로 정비를 하고 있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간단한 지렛대 하나 잡은 걸 보니 공사를 크게 하는 거 같지는 않았다.

묵직한 공사장 신발로 바닥을 두드려 지반을 확인하기도 하고, 신중히 의견을 교환하며 작업은 이어진다. 내가 정상에서 내려오고 있을 때도 조금밖에 앞으로 나가지는 못한 듯 작업은 더딘 것 같다. 산길을 조금 더 내려가니 하얀 마대 자루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고, 중간중간 길을 파헤친 상흔들도 꽤 많았다.


오랜만에 남의 일에 궁금증이 일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들춰보기에 일면 주저하였으나, 소심한 손길로 마대 자루 안의 정체를 확인해 보았다. 하얀 마대 자루 안에는 빚바랜 쇠 말뚝들이 뭉텅이로 들어있었다.

등산로 도처에서는 미처 담기지 못한 여남은 개의 쇠 말뚝과 쇠 말뚝이 든 마대 자루가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다.


아, 이들은 산의 쇠 말뚝 제거 작업을 하는 거였구나.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인의 기를 뽑기 위해 박았고, 풍수학적으로 이걸 뽑으면 좋은 기운이 돌아온다는데,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인지도, 일본이 박은 게 확실한지도 모르겠으나, 오랜만에 맘속이 후련해지는 걸 느낀다.


요즘 장례식에 관한 책들을 연달아 읽어서 그런 것인가?

잘 죽는 것과 잘 치워지는 것, 그리고 슬픔과 애도를 표현하는 이색적 방식들이 많은 생각을 불러 모았다. 이 과정 중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었거나 무시되면 상실의 고통은 지속되고, 좋은 기억들은 망각이 된다.

산을 오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장례식 같았다고. 우리는 장례식의 상주처럼 한 계절이 바뀌도록 일상의 사소한 행복감을 모두 유예시키고 지내왔다. 유예된 형벌을 기다리는 죄수는 현실의 평화를 조금씩 갈아 넣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시시때때로 기약 없는 기대와 기대했던 실망의 교차로에서 사람들은 떼 지어 길을 잃기도 하였다.


이제 각자의 취향대로 장례식을 잘 마무리하고 누군가의 시구처럼 가슴 뭉클하게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그전에 특정하지 않은 반대편 대중을 향한 욕설의 총구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모두 함께 어른이 될 시간이다.


나는 그런 차장님이 정말 어른 같다고 생각했고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차장님은 자리에 앉더니 내게 잠시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는 고요한 주변을 둘러보다가 차장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차장님이 육개장에 밥도 말아 주고 숟가락에 수육도 올려 주었다.

…,

"차장님도 요즘 여자들이 그렇게 싫으세요?"

"요즘 여자들? 우리 회사 요즘 여자들은 다 괜찮아."

차장님은 10년 동안 같은 회사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사람들을 다 회사 사람들과 비교했는데,

어쨌든 괜찮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는 차장님이 그래서 좋았다.

요즘 애들, 옛날 애들 가지리 않고 맞춰 가는 그 융통성이 진짜 멋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 같은 요즘 애들은 똑딱 핀을 만들면서 무언가를 도모할 거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뜻이라는 게 있었다.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 그런 것들. 그런 것이 비록 미적지근할 뿐이지만, 중요한 건 분명히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수첩을 꺼내지 않고 차장님에게 말했다. 차장님, 평생 차장님으로 남아 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차장님이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

(예소연, 그 개와 혁명, 다산 책방, 2025)


그들이 평행선을 그었던 이유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도통 이해할 수 없거나 잘못된 사고들 때문이었다. 태수씨는 과거 운동권으로 늘 노동문제를 비판하고 평등을 강조하는 등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는 진보적 성향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 여자애들에 대해 도통 이해를 못 하고, 가족관계에서는 고지식하고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바지를 입지 말라 하고, 매번 돌아오는 제사에서 부엌일은 엄마 혼자 도맡아 하는 걸 당연시한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해대는 꼰대 같은 언사와 불가산 노동인 가사노동을 외면하는 등 수민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겼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페미니즘 딸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소모적이고 동시에 투쟁이 필요하다.

또, 가부장적인 집에서 자라는 남자아이는 변화된 세상에서 저만은 변치 못하여 혼돈을 겪게 되고, 자기보다 똑똑하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여자들에게 반감과 혐오를 갖게될 소지가많다. 결과적으로 시대를 유연하게 따라가지 못한 태수 씨의 태도는 요즘 여자애인 딸과의 소통을 어렵게 만들었다.

태수씨가 이해 못 한 요즘 여자애들이란, 바로 그의 곁에 있는 딸 수민을 보면 된다.

수민은 아버지가 과거에 진보적인 운동권임을 멋지게 여기고, 자신의 뜻에 따라 페미 운동, 환경운동을 지지한다. 고삼녀라는 말에도 화내지 않고, 인셀은 사랑할 수 없지만,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태수씨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자신이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갖고 있다고 당당하게 밝힐줄도 안다.

또, 몇몇 노인이 상주할 아들이 없어 안타깝다는 말에 그렇게 안타까울 일은 아니라도 반박할 수 있고, 할머니와는 격렬히 싸워 본래 자신의 것인 완장을 차고 장례식 프로젝트를 지휘한다.

처음 본 아버지 친구에게 태수씨가 빌려준 돈을 끈기 있게 달라 하고, 못 받은 50만 원 대신 아버지의 지령에 가담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장례식마저도 훼방 놓기를 원한 태수 씨의 마지막 지령대로, 그가 사랑한 유자를 투입해 장례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시원하게 웃을 배짱마저도 있는, 기세 좋은 요즘 여자애인 것이다.


반면 수민이 어른 같다고 의지하였던 차장님은 태수씨 장례식 프로젝트 수첩에 적힌 중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리는 옛날 사람인 아버지 세대와 요즘 여자애들이라 불리는 페미니즘 딸이 어쩌면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여준 인물이라 주목하였다.


수민은 부모 세대처럼 똑딱 핀을 만들며 무언가를 도모하지는 않지만,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뜻, 의지를 가진 요즘 여자애이다. 그런 수민이 보기 좋았다고 말해주는 차장님에게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느낌도 들었을 것이고, 옛날 애들, 요즘 애들 가리지 않는 융통성 있는 시각이 진짜 어른 같다고 느껴진 것이다.

어른이란 다 자란 성인으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사리 분별이 가능한 수준의 인간을 지칭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어른이 되는 것도 처음이라, 매사에 사리 분별을 하는 것도, 책임질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도 미숙할 수밖에 없다.

경청의 중요함은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잊어가고, 언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방법도, 잘 전달하는 방식도 서투르다. 조급함에 배려는 수시로 생략하였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못하거나 곧잘 오역해 듣고는 한다. 한번 사려 깊게 경청하고 이성을 가진 사람답게 말하면 되는데, 조급함에 듣지도 않고 말을 자르는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서로 머릿속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 진심의 말들을 섞는 일이 적어지면서 세대는 단절된다.

어떤 경우에는 나이가 들수록 더 미숙하고 서툴러지기도 하는 걸 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참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는 학생인 것이다.

그래서 과정 중간에 어른 같아야 한다는 말로 추궁을 받는 것은 사실 조금 가혹하게도 들린다.

어른에 대한 기대가 커서일까?

수민과 차장님과 같은 대화,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할까?

연장자인 차장님만의 대화방식은 뭔가를 가르치는 친절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민의 이야기를 그저 잘 들어주고, 동년배 친구와 이야기하듯 하는 다정한 태도에 있다. 이러면 대화는 쉬워지고 즐거워진다.

그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어른답다거나 어른 같다거나 하는 것이 인간답다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잃어 슬프고 힘든 '인간 동료' 수민에게, 밥을 말아 주고 숟가락에 고기 한 점 올려 주는 정도의 측은지심이면 족한 것이다.

결국, 어른 같다는 말은 그냥 인간답다의 다른 표현일 뿐, 무슨 거창한 지식과 교양이 필요하다거나 오랜 시간 노력해서 얻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연배에 상관없이 인간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인간다운 마음과 태도인 것이다.


작품 속 아버지는 죽음의 고통에 이르러서야 어른으로 성장한 것 같다.

그들이 함께 장례식 프로젝트를 세우고, 긴 고통의 순간과 짧게 허락된 기쁨의 과정 모두를 즐기면서, 아버지 역시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딸이 남자가 아니라서 상주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안타까워하지 않게 되었고,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딸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사는 것보다 죽는데 돈이 더 많이 드는 제도에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힘들어할 딸들을 위해 장례식을 즐거운 소동으로 만드는 개구지고 의미심장한 지령까지 내렸다.그는 죽음은 좋은 애도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즐거운 애도의 기록으로 기억된다.

시기가 조금 다른 이 작품은 죽음을 목도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여서인지, 수많은 잔칫상을 벌여낸 사람들은 화자가 아닌 아버지의 지인들이었다. 슬픔을 녹여내는 방식도 긴 호흡을 착용하였고, 아버지와 딸, 지인들의 사연은 그만큼 더 녹진하고 애잔하였다.


어차피 세대는 변화하는 것이다.

그 개와 혁명은 장례식을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는 듯하면서도, 단편이라는 짧은 호흡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점들을 간결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냈다는 시사점을 갖고 있다.

덕분에 작품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한 호흡 한 호흡이 빠르고 뜨거웠으나, 심각한 주제를 풀어놓을 때도 사랑이라는 것이 작품 안에 면면이 녹아있어 다행히 베이지 않고 유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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