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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단 한 가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by 장민혜

단 한 가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할까. 문득 알고 싶어졌다. 하나여야 한다. 둘 이상은 선택할 수 없다. 한 가지 기억으로 일평생 살아야 한다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머무르고 싶어 할까.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알고 싶어졌다.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지, 아니면 이별 후의 감정에 머무르고 싶어 할지, 자신만의 행복했던 순간을 그리게 될지.


나는 어느 한 순간을 고르라고 한다면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할 듯하다. 사랑에 빠졌던 순간도, 행복했던 시간도, 이별 후의 아픈 감정 속에서 버텨내야만 했던 시간도 모두 나였으니까. 내가 나이기를 포기해야 어떠한 감정을 선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려 본 적 있었다. 애타는 감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끝난 데다 깨진 컵을 붙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인생은 늘 그렇게 흘러간다. 깨진 것들은 깨진 채로, 부서진 채로 점차 흔적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이 되면 완벽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완벽했다고 믿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순간도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기억은 왜 시간이 흐르면 아름다웠던 것으로 미화되고, 행복한 것으로 남을까. 뇌는 부정적인 것을 잊기 위해 긍정적인 것을 택한다고 들었다. 뇌의 일반적인 작용을 통해 우리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긍정적인 인간이 되었을 때, 나를 기억하는 상대 역시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나의 기억은 온전히 너의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너 역시도 그런 것인지. 행복했던 순간, 그리고 냉정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했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째서 행복한 기억인 것일까.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왜 그 주인공은 너여야 하는 것일까.


어떤 날은 기억에 의존하며 살다가도, 어느 날은 기억나지 않아 슬펐다. 슬픔 속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슬픔을 견뎌내는 방법이었다.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어떠한 일을 했는가. 때로는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만취해 보기도 하고, 나를 망가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했다. 인간으로서의 나를 포기한 적이 많았다.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더 큰 파괴와 자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상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서, 상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멸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온전히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온전히 존재한다는 말조차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기를 포기했는데 어떻게 ‘온전히 살아간다’는 말이 통할 수 있겠는가.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면, 세상은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지우기 위해, 상실을 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결과가 고작해야 기억을 잊어가는 것이라니. 믿을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나의 순간은 때로 어느 시간대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물 밀 듯 밀려오는 자괴감을 느끼며 괴로워할 때, 나는 고통에 가득 찬 상태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결국 내 차례가 안 올 줄 알면서도 나는 내 차례가 언젠가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다. 슬픔에도 순서가 있었더라면, 만약 조금 더 늦은 순번이었더라면 나는 아주 조금은 괜찮지 않았을까.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하늘을 자주 본다던 네가 생각났고, 어둠으로 가득 찬 밤이 되면 밤하늘을 노래하던 네가 생각났다. 우리 나중에 꼭 별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여행을 가자고 약속하던 어느 날의 내가 생각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낮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어느 밤이 보고 싶어 여행을 훌쩍 떠난 것도 나 혼자엿다. 누구도 나의 곁을 지키지 않았다. 누구라도 있었으면 했는데,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절망헤 빠지게 했다.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힘들었다.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몹시 어려운 감정이었다.


여전히 나는 혼자 별을 보러 가고, 혼자서 하늘을 이야기한다.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음에도. 하지만 어느 날엔가는 ‘너’에게 닿지 않을까. 우리의 신호가 서로 달라 못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그 신호가 연결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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