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날이 궂다고 했다. 궂은 날이었기에 좀 더 맑은 날이 되면 얼굴을 보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될 줄은 몰랐다. 험한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웠던 나의 애인은 날이 맑게 개자마자 이별을 고했다. 그동안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두 사람이 함께 이야기했던 것과 다르게 이별은 일방적인 통보로 이어졌다. 일방적인 통보 속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10여 분간을 카카오톡 메시지창을 보며 망설였다. 잘 지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망을 퍼부을지, 일방적인 통보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야 할지 나도 내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짧은 만남은 연인의 통보로 끝이 났고, 나는 그를 원망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다. 원망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하루가 지날수록 그에 대한 원망은 커졌고, 무엇이 그를 사랑하게 했는지 이유를 잊었다.
나에게 사랑이란 늘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퍼부어도, 아무리 제 감정을 드러내도, 결국에는 떠나가고야 마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그리 믿으며 살았다. 그래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내 마음을 드러내면 상대는 이별을 고하니까. 머피의 법칙과 같았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내게 상대는 이별을 이야기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늘 누군가를 사랑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무너져 내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더 불안했다. 원치 않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끝내 나의 자존감을 삼켰다. 그들이 핑계로 댄 이유는 늘 비슷했다. “네가 좋은 사람인 걸 알지만 내가 연애를 할 상황이지 않은 것 같아”라는 이유였다. 그놈의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붙잡아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뿐인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연인도, 사랑도, 그 모든 것이 공허했다. 나는 결과론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놓치지 않았겠지. 좋은 사람이 아니었으니 끝을 이야기하고야 만 것이겠지. 그렇게 나의 짧은 연애는 또 끝이 났다.
비 오는 날,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흔적을 남긴 채 떠나간 무언가가 나에게도 있는지. 그러나, 어느 것도 내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왜 흔적도 없이 떠나간 것들은 내리는 비에 실려 내 마음에 툭툭 떨어지는 것일까. 이것이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내 마음이 요동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울적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를 사랑해 달라고 애원을 해도 결국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내 곁을 떠나갔다. 그것이 어떤 사랑이든. 사랑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었고, 그 다양한 유형의 사랑들 중에서도 나는 결국……. 단 한 순간도 내 손에 쥐어본 적 없다는 현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왜 나는 다른 이들은 찰나라도 잡는 사랑을 소유한 적이 없었을까. 내가 사랑한 것들은 왜 나를 떠나갔을까. 그런 것들을 곱씹어 보다가 나는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붙잡고 싶을수록 떠나가는 것이 사랑이기에, 나는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조금 더 내 곁에 두려거든 사랑이라는 단어는 잊어야 했다.
혼자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은 누군가를 곁에 두고 행복해한다. 나를 혼자로 만들고 떠나간 이들은 누군가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결국 누군가가 내딛는 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돌은 잊히기 마련이고,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다시 한번 나를 밟아주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한 번 넘어간 사람은 다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미련이 남은 것은 결국 나일 뿐이다. 이별은 그런 식으로 내게 다가왔고, 사랑은 늘 멀어졌다. 언젠가 완성된 사랑의 형태를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도 헛된 기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랑은 쉽게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다. 나를 고독과 공허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쉽게 실천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사람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고, 나는 무너지고 처참하게 망한 사랑 속에서 없는 서사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의 사랑에는 서사가 없었다. 어떠한 행위도,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노 드라마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모든 것은 바스라졌다. 사랑을 받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사랑을 주는 것도 분명한 서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아아. 이젠 사랑을 하지 않아야지.
사랑이랑은 거리를 둬야지.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서사 없는 이야기를 또 써내려갈 것이라는 걸. 나는 어리석고, 결핍이 가득한 사람이니까. 사랑은 또다시 나를 찾아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할 것이고, 나의 사랑은 잔뜩 썼다가 지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