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키우던 네 마리 고양이 중 두 마리를 떠나보냈다. 한 녀석은 고통을 견딜 수 없었고,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녀석이 견디는 것을 볼 수 없어 안락사를 결정했다. 그다음으로 죽은 녀석은 첫째가 가고 난 뒤 점점 시들시들하더니 병들어 죽었다. 두 번째로 고양이를 보내던 날에는 장마의 시작이라는 말과 다르게 날이 맑았다. 맑은 날, 고양이별로 떠난 두 녀석을 보며 나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울음을 참는다는 것은 내가 녀석들에게 해 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느낀 것은 녀석들의 텅 빈 자리였다. 그 자리를 느끼며 나는 존재의 흔적이라는 것은 녀석들이 남긴 것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녀석은 고등어 무늬를 아로새겼고, 또다른 녀석은 턱시도 옷을 입고 태어난 녀석이었다. 첫째의 생일날 발견됐던 셋째는 유기묘였다. 고양이를 두 마리 이상 키우지 않으리라는 다짐보다 그 녀석이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가을 밤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게 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첫째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두를 지켜봤다면, 셋째는 길거리에서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발견돼 죽음을 봤다. 그것도 사후경직까지 일어난 상태로 마주해야 했다. 그 녀석이 좋아하던 옷을 깔아주고 다음날 아침 화장터로 향하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보낼 준비가 돼 있지 않던 상태에서 녀석들을 보낸다는 게 나의 현실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보내는 법을 알아야 보낼 텐데, 보내는 법을 모르니 보낼 수조차 없었다. 그저 허망한 얼굴로 녀석들의 뼈로 만든 메모리얼 스톤, 혹은 분골한 뼛가루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동물을 묻어주는 건 불법이다. 자연에 대한 훼손 문제가 가장 크기 때문이다. 메모리얼 스톤은 10년 정도를 간다 하고, 분골한 뼛가루는 한두 달밖에 가지 않는다고 하니 녀석들을 먼 곳에 수목장으로 치르고 올 것을 그랬다가도, 이 녀석들이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간직하고 있는 곳에 뿌려주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은 산 이름을 몰랐겠지만, 배봉산자락 아래에 있는 집에서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다. 이후로는 다른 동네로 이사왔지만, 녀석들의 출신지 하나는 확실한 셈이다. 그랬기에 만약 녀석들을 보낸다면 나는 배봉산자락에서도 넓은 공간에 녀석들을 묻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집 앞 청계천도 고려하고 있다. 녀석들이 마지막으로 머물고, 지나쳐 왔던 길이 청계천 앞이었으니까. 그곳에서 녀석들을 보내주고 난다면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을 이승에 오랜 시간 붙잡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 시간 붙잡아두는 것은 녀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 욕심으로 인해 저승에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녀석들을 붙잡고 구천을 떠도는 혼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원망마저도 나에게 돌아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오랜만에 맛보는 상실이었다. 상실은 미각과 후각, 촉각, 청각 등의 감각을 마비시킨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물속에서 내가 사랑했던 이와 함께 죽음을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식으로 3주 동안 두 번의 죽음을 겪고 나니 나는 이곳이 습도 때문인지, 아니면 숨을 쉴 수조차 없이 괴로운 공간이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사실은 내가 여전히 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녀석들의 빈자리에 공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고양이 네 마리 중 절반을 떠나보내고, 남은 두 마리가 있음에도 나는 그들이 채워넣었던 공간에 대한 부피감을 잊지 못해 망설이고 있다. 어떻게 해야 너희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어떤 방식이어야 너희가 조금 더 평화로운 가운데 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까. 이 별에서 이별을 하게 된 것은 우리인데, 우리의 이별은 왜 이렇게 허무하기만 할까. 만약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더라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간 동물이 마중을 나온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를 원망하며 나오진 않을까 걱정했다. 나를 원망할 것이라면 미리 많이 해 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그리움이라는 궤도 위에 올라섰다. 때로 나의 공전과 너의 공전은 맞아떨어지지 않아 먼 곳에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느 순간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맞닿아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여전히 너희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작정 너희를 그리워하곤 한다. 환청임을 알면서도, 너희가 더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나는 너희의 움을과 함께 미어지는 가슴을 억누르곤 한다. 왜 나보다 짧게 살아갈 동물을 사랑해서는, 왜 나보다 짧은 생을 살아갈 이를 사랑해서는 이토록 아픈 것일까. 만약 너희의 삶이 거북이처럼 길었더라면 너희를 두고 내가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너희를 모두 하나씩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은 아닐까. 오래전 한 거북이와 네 마리의 고양이가 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지어 보려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움은 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려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 형태를 보존할 수 없는 감정을 정의내림으로써 그리움의 크기는 달라진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그리움을 보곤 한다. 그리움이란 것은 결국 내 안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결핍이기에. 결핍 속에서 나는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곱씹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이 그리움이라는 사실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