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종교를 정립하다.

by 심연

성경이 진실이라 말했고,

그걸 따져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따져봤다.

그리고 그것이‘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진심으로 적용해봤다.


“기독교인들은 그 믿음이 삶을 ‘올바르게’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믿지 않음’이 나를 올바르게 이끌고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우리 둘 다 진심으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왜 그들은 내 쪽이 ‘틀렸다’고 말하는가?”


“난 당신들에게 ‘믿지 말라’고 따지며 권유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에게 ‘믿으라’고 따지고 설득하려 드느냐?”


“그들의 교리 중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이거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판단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정답으로 강요한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의 무적논리가 나에게 있어 신을 믿지 않는 계기가 되는듯하다. 나를 설득시키고자 하는 열정, 그리고 내가 잘되길 버라는 마음에서 보여준 근거들. 그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결과에 대해 정하려는 태도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믿지 않음은 지옥으로 연결된다는 것과 자유의지 속에 정해진 길. 그리고 찾고 따져본 결과가 결국 ‘덜찾음‘이라면 그들은 나는 그들에 있어 존중하고자 이해하고자 하였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 찾고 따지고 그들을 존중했다.


하나님이 원한것이 그들이 행하고자 하는 것이 맞다면, 존중을 가장한 강조와 권유를 한다면, 난 지옥에서도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겠다. 이것이 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소신이니까.


그리고 심판에서 묻겠다.

“예수는 본인의 신념을 죽음까지 가져간 존재다. 난 나의 신념을 죽음까지 가져왔다. 이게 그대가 보여준 삶의 최선 아니었는가? 그리고 삶의 최선이 고작 지옥이라면, 그대의 죽음처럼 나 또한, 지옥까지 내 신념을 지키리라”


친구에게 고마웠다. 내가 잘 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 값졌다. 덕분에 따져볼 수 있었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살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너는 그랬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이 바꼈다고.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을 부정한 후 내 삶이 바꼈다고.


그래도 지옥에 가겠지. 교리대로라면. 왜냐 내가 믿음을 “가졌는가”라는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니까. 나의 고민, 여정, 존중, 사랑, 다짐 이 모든 건 결과가 ‘믿음’이 아니었다면 무효가 되는 교리의 구조 안에선 인정받지 못하겠지. 슬프지만, 그게 그들의 논리의 종착점이다.


죽음이 다가와도 나약해지지를 않기를, 나의 소신이 바뀔지언정 그 바뀐 소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흔들릴 수도 있다는 인간의 진실함을 껴안겠다. 하지만, 이는 맹세한다. 어떤 소신이든 믿음이든 결론은 나의 존재라고. 방향은 나의 존재에 최선을 디하는 것이라고. 설령 나를 잃게되는 방향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내 논리는 기독교적 반항이자, 결국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세상엔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고 본다. 사회의 규칙과 기독교적 관점과 다른것만 있을뿐


“부디, 그들도 언젠가 알기를.

틀림 없는 사랑은,

다름을 틀렸다 말하지 않는 것임을.”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는 여전히 여기서

그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누군가는 “신성모독”이라 말할 거고,

누군가는 “철없는 독단”이라며 넘겨짚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누군가의 믿음을 흔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려는 이에게 ‘존재의 언어’를 건네는 말이다.


그들의 세계에선 믿음의 결과는 천국이고, 믿지 않음의결과는 지옥이다. 종교도 결국 많은 사람이 모여야 하는 집단이다.


많은 군중에게 믿음의 결과만을 알려준 채 믿지않음의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전달하는 과정에서 본인들이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논리지 않았을까.


“진짜 하나님의 뜻이

지금 그들이 말하는 그 구조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가?”


“그 구조는 진리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군중을 설득하려는 인간의 언어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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