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의 틈
가을이 아프다.
사랑하는 여인이 말하곤 한다. “가을이 되면 나는 아파요.”
후덥지근하고 숨이 턱턱 막히던 더위가 엊그제 같은데, 아침저녁으로 제법
바람이 쌀쌀하다.
봄의 푸릇푸릇한 나뭇잎은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새싹이 열매를 맺는 완성의 계절
보일러의 온기가 반가운 때로 돌아왔다.
타인의 독촉장
아내는 말한다.
‘이것 좀 깨끗이 해줘요, 일을 시작했으면 마무리도 지워줘요’
자식은 졸라댄다.
“이것 사줘요, 저것이 필요해요”
직장 상사는 일을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고
아래 직원은 부탁을 한다.
“선배님, 이것 좀 해주세요”
그들의 요청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을 법한 일을
과하게 요청하는 듯한 사람들.
귀찮고, 움직이기 싫고, 하기 싫은 일들이다.
나는 적당히 할 만큼 하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집요하게 해 달라고 할까?
그들은 나와는 다른 성향의 존재들이고,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지나치다. 때로는 병적이다.”라고 말한다.
조금은 유별난 사람들.
나는 ‘대부분’이라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보며 갸우뚱해하고, 때로는 대치되는 상황으로까지 나아간다.
나는 적당히.. 알맞게, 상식의 리듬 속에서 살아온 사람.
평균과 상식, 일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보통 사람이다. 라고 나 자신을 여겨왔다.
나 스스로를 오른쪽 편에 넣고 이것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온 것이다.
그들이 왼쪽으로 치우친 삶이라면, 나는 오른쪽 끝 가장자리에 머무는 삶이었다.
정 중앙을 기점으로 왼쪽의 끝에 있는 사람들과 오른쪽으로 끝에 있는 내가 서로를 바라보며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다.
그들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는 '존재의 독촉장'과 같은 이들일지 모른다.
왼쪽 끝에서 보면 오른쪽 끝은 한 없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이 무의식 적으로 내 안의 잠든 절반을 일깨워 주는 존재라면,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의 목소리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무언가를 빨리 갚으라고.. 독촉한다.
빚을 독촉하듯 나에게 요구하는 존재, 조금더 해 보라고 끝까지 완성하라고 하는 요청 속에는 채권자인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존재의 숨결이 감추어져 있다.
더 나아가라는 더 넓어지라는 속삭임처럼 말이다.
나는 존재에게 갚아야 할 오래된 채무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일 수도 있고, 혹은 아주 먼 과거에 그(그녀)에게 빚을 진 것이다.
봄과 가을의 거래
옛말에는 부모와 자식, 부부는 전생의 원수라는 말도 있다.
원수, 갚아야 할 것이 있어서 다시 만난다는 뜻일 것이다.
가정과 사회는 나와 다른 性, 다른 기질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서로 비슷해 협력하기도 하지만 반대되는 흐름 속 보이지 않는 집안, 존재의 결이 살아 숨 쉰다.
봄 가문과 가을가문처럼 말이다.
가을 가문은 봄 가문에 빚을 지고 있다.
가을은, 봄이 힘들게 내어 놓은 싹에 열매를 맺어야 하는 빚이 있고,
봄은, 가을 열매 속 씨앗을 싹으로 피어 내야 하는 빚이 있는 것이다.
봄의 새싹은 가을에 열매를 맺을 때 완성되고
가을 열매 속 씨앗은 봄에 꽃을 피어야 완연해진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렇게 계절은 서로에게 빚을 지고 갚으며 순환한다.
빚의 그림자
가까운 이의 요구나 질타에 맞서는 행위는 갚지 않으려 회피일 수 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이자가 붙어 나를 옥 죄일 것이다.
빚을 갚지 않으면 그 빚쟁이는 갚을 때까지 지독하게 쫓아다니다.
아내 에게서 갚지 않으면 자식의 모습으로,
자식에게서 갚지 않으면, 직장 상사의 얼굴로,
타인의 모습으로 옷을 바꿔가며 계속 찾아올 것이다.
‘이 정도면 됐다’는 안일함과 방만함, 완벽주의와 독선 그 양극의 습관들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며, 다른 존재를 놓치고 있는 ‘우리들의 빚’ 일지 모른다.
가까운 이에게서부터 빚을 갚으면, 빛의 그림자는 더 이상 우리를 쫓아다니지 않는다
대출을 모두 갚았을 때처럼 속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함을 느낀다.
돌고 도는 세상 속에서 다른 존재에 진 빚을 모두 갚으면
허공을 날아다니는 듯한 청량감을 맛볼지 모르겠다.
신용불량자란,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존재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사랑스러운 신용불량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