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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나는 새를 보라"

헤라클레스의 틈

by 맨발바닥



울음소리가 들린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촌동생들이 울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에 어머니와 함께 가서 조의를 표한 후 일가친척을 만나 뵈었다

장례 후 어머님이 초 겨울인데도 나비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며 순박하게 사신

작은 아버지가 나비가 되셨나 보다 하신 기억이 난다.


"나비가 되어 결혼식에 온 아빠"


얼마 전 유튜브 영상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결혼식 도중 갑자기 나비가 날아와 신부의 어깨 위에 앉았다

신부는 순간 울음을 터트렸다 신부의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고

딸의 결혼식을 함께 하지 못할 것을 늘 걱정했었다고 한다 쌀쌀한 날씨의 2층 예식장이었는데 딸의 결혼식을 보지 못한 아버지의 축복이 아니었나 하는 영상이었다


선하게 살면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의 층 위로 올라가는가?

마태복음 7장 26절에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느냐?'

마태복음의 구절에서는 하고 많은 생물 중 하나님이 새를 기르신다고 하셨을까?

새는 신성한 존재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있는 것일까?


신화 속 그림에서 천사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

새는 하늘을 주 무대로 삼아 생활하며 이따금 먹이를 먹을 때만 땅 혹은 나무에 앉는다

수많은 생물 중 가장 높은 공간에서 생활한다.


인간에게서 새의 성질을 찾아본다. 유유히 허공을 누비며

그 정신은 여기저기 마음대로 과거와 미래라는 공간을 새처럼 바람처럼 날아다닌다

그 위치는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머리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또한 인간은 나무의 성질처럼 땅 위의 다른 동물과 달리 유일하게 직립으로 서있는 존재이고

나무를 닮아 똑바로 서있다.

움직인다고 하지만 한 발은 늘 땅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옛말에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땅과 몸은 둘이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은 땅의 성질을 닮아 많은 것을 저장하고 그 토대 위에 수많은 생산물을 매달고 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자라며 성장한다.

땅이 키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 몸속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붉은 강이 흐른다.

인간은 가을 결실을 맺은 열매처럼 몸속에 정자와 난자라는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씨앗은 다음 세대에 열매가 되고 또 다른 씨앗을 품어 인류의

순환이라는 재생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탈레스와 같은 고대의 자연철학자들, 위대한 수행자 싯다르타는 흙 물 불 바람의 4대 요소와 오온으로 이루어진 인간을 이야기한다.


태아는 엄마의 자궁 안에서 웅크린 형태로 있다가 자궁을 나오면 기지개를 켜듯

활짝 피어난다

지구 역시 둥그런 구체를 하고 있다

인간은 거대한 지구와 같이 하나의 작은 지구와 같은 존재이다

지구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함축한 구체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거대한 지구와도 같은 인간이 작은 돌연변이 암세포에 의해서 죽는다

암세포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미세하고 광학 현미경으로 보아야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미세한 세포에 의해 지구만큼이나 거대한 몸짓이 하루아침에 쓰러지기도 한다.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세포들과 마찬가지인 인간에 의해 지구 역시 쓰러질지 모른다.

단지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 의해 지구가 쓰러진다면 인간은 암세포와 비슷한 존재가 될 것이다.

자기 존재의 경계를 잃은 세포, 정상세포의 돌연변이, 통제 불능의 생명이 된 세포를 암세포라 한다.

우리 몸의 세포는 필요할 때만 분열하고,

다 쓴 세포는 자연스럽게 죽는(세포자멸사, apoptosis)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신 문명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이 낳은 문명

유전자 조작과 생명복제에 대한 창조

물질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나 아가는일

새로운 인류 (ai)의 탄생

이러한 행위는 대 자연이자 신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인 신화 속 바벨탑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구약성경의 신화 속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함으로 만든 바벨탑

자만과 허영에 빠진 인간에게 신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게 하는

벌을 내려 끝내 바벨탑은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는 과연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의 순환의 원천 생식능력은 퇴화되고 보다 낮은 존재에 인간의 사랑을 쏟고 있으며

AI를 탑재한 기계를 출산하고 있는 이 시대

단세포 보다 어리석은 그들이 암세포로 변질되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과거로 회귀할 수 없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TV 냉장고가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변화의 거부가 아닌, 근원으로 회귀

인간성, 존재의 본질, 신성을 찾아 나서는데 힘써도 좋을 것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에 대한 형벌로 모든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한 신

인간은 머리의 위치를 손바닥으로 떨어트리고 핸드폰이라는 AI문명에

고개를 떨구고 경배하고 있다.


신 문명은 신이 내린 형벌인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기를 통해 너무도 쉽게 하나의 언어로 다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중 나는 새를 보자

높이 나는 새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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