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의 틈
한 죄수가 1평 남짓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감옥에 갇히기 전, 더 넓은 사회라는 공간에서 생활해 본 적이 있었고
그러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있는 곳이 감옥임을 안다.
1959년, 인류가 달을 탐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지구라는 공간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다.
그러나 달에 다다르며 지구 보다 더 넓은 공간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제야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주를 본 이후, 인류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 공간인지 깨닫게 되었고,
한 공간 속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다 넓은 공간을 인지하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고 그보다 작은 공간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계로 나아간다면, 태양계 또한 얼마나 작은 공간 속에
한 점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 공간에 대한 인식‘ 속에는 항상 ’나‘라는 공간이 들어가 있다.
그것이 감옥이든, 집이든 나라이든지 간에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1평도 되지 않는 가장 작으면서
모든 사람이 갇혀있는 큰 감옥이 있다.
우리 모두가 갇혀있는 감옥
그것은 언어의 감옥일 것이다.
밝은 세상 속 사람과 사물을 그 형태에 따라 규정짓고는 마음속의 언어로 해석을 한다.
언어를 통해 사람들은 소통하고 협력하며 관계를 이어왔다.
어찌 보면 언어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였을지 모르겠다.
성경 속에서도 언어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니라 “
이 ’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들은 존재는 인간일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시작과 언어는 그 궤를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의 굴레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다면
그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언어에 내가 갇히는 것, 그것이 바로 언어의 감옥이다.
우리들은 이 언어와 문자의 감옥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감옥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감옥에 갇혀 있기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세계를 직접 경험해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감옥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언어로 나뉘기 이전의 존재일 것이다.
바람 같은 존재가 언어라는 틀에 갇히면서 그 공기의 결에 함몰된다.
고요한 사찰이나 교회 예배당 속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우리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성스러워진다.
그렇듯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언어에
나는 스며드는 것이다.
내가 기쁘고 즐거운 언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은 들뜨고 환희에 차지만.
고통이라는 언어의 숨결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마음은 고뇌로 가득 차고,
그 감옥에서 빠져나오려면 한동안의 시간 속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가 언어라는 테두리를 만들었음에도 그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다.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타인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마음의 소리가 있다.
분명히 들을 수 있고 느껴지는 이 소리와 상(象)은 분명히 들리고 보임에도
타인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언어의 소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나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의 공간 속에 갇혀 있다는 ’ 앎‘ 이자 그 너머 희망일 것이다.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라고 불리는 이 공간에서
끊임없이 들리는 소리에 집중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고기가 자신이 존재했던 곳이 물속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땅 위에서 펄쩍펄쩍 뛸 때에 비로소 그곳이 물속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의 길이며
석방은 그 길 위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