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의 틈
아파트 후문으로 산책을 나가면, 넓은 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주변 밭에는 농작물이 여물어 가고, 산등성이에는 큰 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다.
쭉쭉 뻗은 나무를 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발걸음도 덩달아 경쾌해진다.
나무는 위로 뻗는 성질이 있지만, 자세히 보면 사방으로 퍼지고자 하는 존재이다.
하늘로, 하늘로 오르며 가지를 치고 잎사귀를 퍼뜨리며, 뿌리는 땅속 깊숙이 퍼져 있다.
사람의 머리는 몸의 가장 위에서 생각을 펼치지만,
동물의 머리는 하늘이 아닌 앞쪽을 향해 있다.
새 역시 먹이를 찾을 때 부리가 달린 머리를 앞으로 빼쭉 빼쭉 내밀며 걷는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나무처럼, 인간의 머리는 생각과 상상을 넘나들며
팔다리를 벌려 그 범위를 넓혀간다.
인간은 어쩌면 나무의 속성을 닮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무처럼 뻗어 나가지 못하는 마음
사람들은 열망하는 것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 열망이 실현되면 좋아하고, 실현하지 못하면 좌절하고 괴로워한다.
이것이 바로 ‘집착’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인 속성이지만,
우리가 고통을 맞닥뜨릴 때 진짜 괴로움은 고통 자체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났을까?’ 하는 원망과 후회, 회피와 부정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평온하지 못한 자신을 보며 집착하기에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불교 잡아함경에서는 이것을 ‘두 번째 화살’이라 한다.
나무처럼 뻗어 나가지 못하는 상태인, 작고 좁아진 마음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 성질이며, 그 형태는 ‘펼쳐짐’이다.
반대로 싫어하는 마음은 좁아지고 움츠러드는 흐름을 가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얼굴과 몸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 근육은 일그러지고 쪼그라들며,
분노의 눈빛은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다.
우울, 두려움, 고통은 몸을 움츠리고 작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인간의 본래 성품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나아가 펼치고자 하는데
그 성품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즉 불만족과 고통 때문에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펼쳐지지 못하고 위축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정신이 뻗어 나가면 근육은 풀어지고 입은 열리며 웃음이 나온다.
은은한 미소는 넓어지는 과정이고, 경쾌한 웃음은 정신의 흐름이 ‘팡’ 하고 터진 순간이다.
이렇게 퍼지려는 속성이 작아짐 속에서
존재가 수축되고 마음은 ‘싫다’는 소리로 표현되며 근육은 움츠러들어
결국 ‘고통’이라는 이름 속으로 들어간다.
존재의 욕구를 벗어나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행복이라는 이상향을 만들고 그 마음에 매달려 쫓아가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수행법
좋아하는 것을 탐닉하고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사람들은 종교를 찾고,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을 배우며,
마음을 이해하려 심리학을 공부한다.
어떤 이는 수행을 통해 자신을 갈고닦는다
가장 적극적인 고통의 해결은 종교 속 인내와 금욕에 바탕을 둔
수행자의 길이다.
그리고 모든 수행의 중심에는 마음에 대한 ‘집중과 관찰’이 있다.
태국, 인도, 미얀마 등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집중(사마타)과 관찰 (위빠사나)’이다
그들에게 상가에 대한 보시와 존경은 일상이다.
수행과 출가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들의 수행은 더운 나라답게 여유롭고 급하지 않다. 여름 태양처럼 한가롭고 느긋하다.
한국의 불교 수행법 가운데 하나인 ‘간화선’은 화두를 붙잡아 의문을 폭발시키는 수행법이다.
이 방법은 강력하지만, 수행자는 찌꺼기처럼 남은 업을 닦으며 만행을 통해 정화한다.
남방불교의 수행은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자연스레 녹는 과정이라면,
간화선은 그 얼음을 정으로 쪼게 깨뜨린 후 녹여내는 과정이다.
한국의 간화선은 봄의 기운처럼, 나무가 뻗어 나가듯 폭발적인 수행법이다.
티베트의 불교는 추운 지방답게 깊은 삼매와 환생을 이야기한다
깊은 삼매는 마치 마취된 환자처럼 의식의 깊은 상태로 들어가게 하고, 깨어남은 마치 환생과도 같다.
베트남의 종교 탄압 속에서 틱꽝득 스님은 반정부 시위 중 좌선을 한 채 휘발유를 뿌려
소신공양을 했다.
그의 몸은 미동조차 없었고, 외마디 비명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선정 삼매의 힘이다.
이처럼 각 나라의 기후와 환경에 따라 수행법 또한 다르게 꽂을 피운다.
또 하나의 길
목적지는 같지만 그 길에 조금은 다른 방식이 있다.
그것은 분리가 없는 상태 ‘나’라는 에고가 산산이 부서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너와 나의 분리가 없는 “하나” 구분되고 나누어 짐이 없는 상태.
나누는 순간 두 개의 대상이 생기고 그곳에는 하나의 기준점이 생겨난다.
하늘과 땅을 나누면, 하늘에 기준점을 두고 땅을 평가한다.
남자와 여자로 나누면, 남자라는 기준점에서 여자를 평가하고,
타인을 기준 삼아 나를 재단하고 잘라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나누어지지 않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모습 일 것이다.
‘나’가 녹아 버린 그 자리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의 모습과 음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그 입술과 손을 빌려 나타나신다.
나와 다른 성,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나를 성가시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 속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가벼워 보일지 모르지만, 나와 전혀 다른 사람과 한 공간 속에서 부딪친다면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인 것이다.
나와 다른 타인을 통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과 훈련
그를 온전한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름에 대한 좋고 싫어하는 마음, 즉 집착이 없을 때에 가능하다. ‘나’라는 아상이 녹아내릴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믿는 마음은 가을을 닮아있다.
가을의 열매는 풍성한 과실 속에 씨앗을 품고 있고,
그 씨앗은 다음 세상을 열어준다.
‘나’라는 자만의 열매에는 나를 있게 한 씨앗이 있으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새겨져 있다.
그 씨앗은 세대를 이어 나를 만들고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나’를 만들어 왔다.
나아가야 할 길
주어진 환경과 기후 조건에 따라 다양한 수행법이 존재하듯
집중된 시간을 쓸 수 없는 현대인에게 알맞은 수행법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받아들임일 것이다.
타인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집착이 없는 상태이며,
집착이 없다는 것은 중도를 의미한다.
그것은 나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깨달음을 어떤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고
수행이라고 하면 일정 상태에 도달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깨달음의 길 끝에는 분별이 없는 ‘하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에는 ‘집착 없음’이 따라야 할 것이다.
중국 선불교 임제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아상(我相)과 어떤상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경계를 이르는 말이다.
제 아무리 거창한 것일지로도 집착하면 하나의 상(相)일 뿐이라는 것이다.
집착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에고가 빠진 온전한 받아들임과 같은 것이다.
이 길은 집중된 수행 환경 속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현대인에게
가장 알맞은 수행법일 것이다.
일반인의 수행법인 타인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받아들임.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이며 집착이 없는 상태에 대한 증명인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사찰이나 교회 속이 아닌
보다 넓은 사회라는 공동체 속의 수행자인 것이다.
온전한 받아들임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집착의 힘은 뜨거운 프라이팬에 달라붙은 고기처럼 강렬하다
그러나 온전한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더 자유로워진다면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는 맑은 기름이 부어진 것이고
고기는 프라이팬 위를 자유롭게 미끄러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고기처럼 정신과 몸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를 붙잡고 있는 땅의 중력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땅에 뿌리를 내린 채, 하늘로 높이 치솟은 나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