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이 뭐가 두려운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널 낳은 건 멋진 일이었어"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이란 소식에
많은 기대 속 영화가 개봉하자
사람들은 난해하다는 등의 해석적인 부분에서 어렵다는 평을 들었다.
8년이라는 제작 기간에 걸맞게
청각적인 면, 시각적인 면에서는
지브리 역사상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것일까.
본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인 만큼
지금껏 해보지 못한 시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에 대한 혐오감은
그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표현된 영화이고,
주인공의 복잡한 감정은
명쾌하고 긍정적인 주인공들을 선호하던
지브리의 영화에선 많이 다루지 않았던 특징이다.
그렇다 보니 주인공의 예의 바르고 성숙하면서도
내면에서의 어린 면에서 나오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은
영화 보는 내내 왜 그랬을까 하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성격의 주인공을 만들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본 영화에 담고자 하였다.
그런 그는 전쟁을 겪은 세대의 사람이다.
일본에 전쟁이 한창일 때에
그의 집은 마당만 해도 1000평이 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던 그는 마냥 노는 것이 좋았지만,
나이가 들고 모두가 힘들던 그런 때
전쟁의 아픔을 자신만 몰랐던 것에 깊은 죄책감을 갖게 되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와
그녀의 뱃속에 아이를 가진 채 재혼하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도 미야자키 감독의 아버지도
재혼을 했었지만 자식인 그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후 성인이 된 미야자키는 서류를 떼던 과정에서
아버지의 재혼 사실을 알게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비롯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모습에서 영화의 마히토는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보다 10살은 많게 표현되지만
감독 본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해도 무방하다.
영화의 불친절함에 더불어
감독의 이러한 비하인드를 몰랐던
관객들은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었다.
숲 속으로 가는 나츠코 (새어머니)를 봤지만 무시했다.
마히토는 계속해서 만들던 화살에 몰두하다가
책 더미를 쓰러뜨렸고,
쓰러진 책들 중에서 어머니가
자신에게 쓴 책을 찾게 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구와 함께
친어머니인 자신이 죽고 언젠가 성인이 될 아들,
즉 자신에게 남긴 말들을 읽는다.
화재 속에서 시신도 찾지 못한 어머니가
글로나마 자신에게 남긴 유언…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리던 마히토는
아버지가 나츠코를 찾는 소리에 찾으러 달려 나간다.
어머니의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에
마히토는 대답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츠코를 자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아버지가 사랑하고, 어머니가 사랑하기에
사라져버린 나츠코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의 유언에 대한
자신이 할 수 있던 최소한의 대답이었다.
사람들이 난해하다, 불친절하다고 느낀
대부분의 장면들은
지하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일 것이다.
신비롭고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보통 주인공은 관객들을 대신하여
관객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고 알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이상하게도
지하의 새로운 모든 것들에
익숙하진 않지만 무덤덤하게 대한다.
마히토의 이런 모습에 관객들은
영화의 흐름에 몸을 편안히 맡기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영화의 흐름을 가르는 바위가 되었을까.
이 영화에선 무언가 의미를 지닌듯한
몇몇 생명체가 등장한다.
그중 '와라와라'는 지하세계에만 존재하는 생명체로
지하에서 성장을 마치면
지상으로 올라가 새로운 생명체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이런 와라와라를 먹이로 삼으며
생을 이어가는 펠리컨들이 나온다.
지하세계에 왔을 때 본 펠리컨들의 모습.
지성이 없는, 본능밖에 남지 않은 듯한 모습에
마히토를 비롯한 관객들은 잡아먹히던 와라와라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저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던 도중,
‘히미’라는 불을 다루는 여성이 불을 이용해
펠리컨을 죽이지만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까지도 불에 타게 된다.
마치 마히토가, 미야자키 감독이 겪은 전쟁처럼
시작의 계기가 어떻든 참혹한 아픔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늙고 병든 죽기 직전의 자신을
죽여달라는 펠리컨 한 마리가 마히토를 찾아온다.
펠리컨도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고,
자신들도 그저 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전하며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마히토는 펠리컨을 싫어했다.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자신을 공격해 왔기에.
그렇지만 지금껏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 없는 마히토는
비로소 그들을 이해하며, 조용히 땅속에 묻어준다.
미야자키 감독은 주인공인
마히토에게만 자신을 투영시킨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배경과 사건들은 마히토에게,
자신의 현재 생각과 위치, 후대에 대한 자기반성은
큰 할아버지에게 투영시키었다.
미야자키 감독은 후계자를 찾는 데에 실패하며
수차례 은퇴를 번복하여 감독 생활을 이어갔다.
특히 자신의 아들은 3D 계에 진출하며
자신의 뒤를 잇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큰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마히토의 어머니와
나츠코가 가진 아이 그리고 마히토까지도
지하세계로 불러들이며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론 실패하였다.
마치 진작에 아들을 자신의 뒤를 잇게 하지 못했던
과거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
잉꼬의 대장이 지하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단순 자신의 세계가 몇 가지 블록으로 이루어졌단 사실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부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래도 큰 할아버지라면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설계한 세계의 결과물이
파멸을 택한 것 또한 자신이 만든 결과물이기에,
무너뜨렸다는 선택에 대해 거부, 부정하지 않으며
세계는 무너진다는 결과를 맞이한다.
이 부분을 보며 난 큰 할아버지에
미야자키 본인을 투영시켰다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마치 후계자를 찾지못한 자신의 지브리를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주는 미야자키를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지막인 은퇴 작품에
이러한 장면을 넣은 것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죄의식, 죄책감을
영화란 자서전에 독백으로 푼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회사인 <지브리 스튜디오>의 후계자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태도를 담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작품으론
지금까지의 어느 작품보다도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동안의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내 곁을 스친다..
그 스쳐 지나간 작품들의 끝에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 나지막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