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우리는 왜 ‘별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을까?
요즘은 ‘무난함’이 미덕이 된 세상 같다. 이상하게 튀지 않고, 분위기 맞추고, 말 조심하고, 감정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옛 드라마 속 인물들은 달랐다. 그들은 이상했고, 별났고, 불쑥 감정을 드러냈다.
드라마 천국의 나무 속 윤서는 눈 쌓인 길 위를 맨발로 걸어다니는 인물이었다.
말수는 적고, 감정 표현도 평범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저런 사람도 있지. 말 대신 몸으로 말하는 사람, 고통을 드러내는 방식이 조금 다른 사람.”
요즘은 그런 인물들이 ‘이상하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어긋남’이 사람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기억에 남게 만든다고 느꼈다. 드라마는 그 어긋난 인물들을 감싸 안아주었고, 우리는 그런 인물들을 통해 잊고 있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돈된 인간, 정리된 관계
SNS를 통해 감정을 빠르게 공유하고 소비하면서, 자기 표현에도 ‘정돈된 매뉴얼’이 생긴 것 같다. 울 때는이 정도 울어야 하고, 웃을 때도 이 정도 웃어야 하고, 화는 될 수 있으면 참아야 하고.
그 사이, 윤서 같은 인물은 ‘민폐’가 되었고, 다른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비논리적’이거나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몰리게 되었다. 별난 캐릭터가 사라진 드라마를 보며, 나는 그것이 단지 콘텐츠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정서적 여유가 사라진 징후가 아닐까 생각했다.
별남은 약함이 아니라 ‘풍성함’
어쩌면 별난 사람은 세상이 잊은 감정을 붙잡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별남은 비효율이자 여백이고, 타이밍을 놓친 말이자 엉성한 진심이며, 이 시대가 놓쳐버린 어떤 따뜻한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예전의 드라마들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서, 존재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내가 그 드라마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 속에서 내 마음의 느린 부분, 어설픈 부분, 어긋나는 감정들까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김서령 작가의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책에서는 처음보는 단어가 나온다. ‘왕청스럽다’다. 그러면서 작가는 예전엔 왕청스러운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씁쓸해하셨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옛날엔 인터넷이 없었기에 표준화 된 것들, 정형화된 것들이 덜 할 것이었다. ‘왕청스럽다’라는 단어가 사라지 듯이, 사라진 ‘왕청스러운’ 사람들..
"아유, 왕청스럽게 왜 그러노."
어릴 적 어른들 입에서 종종 들었던 말이다.
‘왕청스럽다’는 말은 좀 별나고 괴상한 사람,
‘정돈되지 않은 행동이나 외양’을 가진 사람에게 붙던 말이었다.
그들은 말투가 이상하거나, 옷차림이 뒤죽박죽이거나, 날짜 개념이 없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별남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무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갖다 붙여도 맞지 않고, 설명하려 해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지금 같으면 "사회성이 부족하다", "왜 저래"라는 시선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전엔 그런 사람도 그냥 동네에 한 명쯤은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의 이야기가 동네의 정서적 구석구석을 메워주기도 했다.
이상한 사람을 품는 사회
지금 우리는 ‘이상한 사람’을 보면 무심코 거리를 둔다.
그들의 말투나 걸음걸이, 옷차림이나 웃음이 ‘정상’의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런 사람은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피곤한 사람”이 되곤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진짜 어른스러운 사회는 그런 ‘왕청스러움’을 용납하는 곳이 아닐까?
기이한 행동, 이상한 말버릇, 뭔가를 몰라서 실수하는 그 느슨함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웃어넘겨줄 수 있는 사회.
옛날 드라마들을 보니 왕청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편지를 굳이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보내는 사람이나, 천국의 나무 윤서도 그렇고..
윤서는 맨발로 눈길을 걷는다. 어디에 있어도 혼자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존재.
그 별남을 조용히 안아주는 연출과 대사들은,
왕청스러운 나의 일부까지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우리가 너무 정상성에 집착하지 않고,
누군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면,
조금은 더 살기 편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왕청스럽다는 말이 다시 쓰이진 않아도,
그 말이 가리키던 ‘괴짜같은 삶과 행동의 흔적들’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조용히 끌어안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