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대는
“당신은 좋은 부모입니까?”라는 질문을 직접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더 이상 말이 아니라 공기처럼 작동한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고,
누구나 마음속으로 매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나는 부모님을 오랫동안 원망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모든 회사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가정을 돌볼 여유조차 없던, 그 시대의 전형적인 가장이었고,
엄마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재테크와 육아를 병행하던 억척스러운 한국 엄마였다.
성과를 내야 했던 우리 집에서는
과정보다 늘 결과가 중요했다.
나는 늘 긴장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결과를 내야 하는 아이였다.
당연히 내가 낸 결과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 실망은 고스란히 내게로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반복되는 굴레가 시작되었다.
결과를 내지 못하는 나 → 실망한 부모 → 더 불안한 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재능을 펼치지 못한 건 다 부모님 탓이야.”
부모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먹고사는 게 1번이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키우려고 정말 애썼다.”
“그땐 요즘처럼 육아정보도 없었다.”
나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아이에게 따뜻한 정서를 건넬 줄 아는 부모는 있었을 거라고,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더 오래도록 원망했다.
그런데…
내가 부모가 되고 나니, 그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지금은 육아정보가 넘쳐난다.
부모교육, 뇌과학, 질문의 기술, 메타인지…
너무 많아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과잉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재료는 넘치지만,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직접 부모가 되어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모님도 그 시대가 말하던 ‘좋은 부모’가 되려 애썼던 사람들이었구나.”
그 시절엔
‘풍요’를 제공하는 것이 좋은 부모의 역할이었다.
지금 우리가 강조하는 가치들처럼,
그 시대에도 나름의 ‘정답’과 ‘프레임’이 있었던 것이다.
목표와 수단,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도 결국은
‘좋은 부모 = 풍요로운 부모’라는 기준에
조용히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질문하는 부모가 아이를 바꾼다”
“메타인지 높은 부모가 자녀를 키운다” 같은 말도
어쩌면 또 다른 방식의 압력일 수 있다.
부모가 되기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들이 의미를 넘어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말로 하는 폭력이 아니라,
측정할 수 없는 프레임이
부모 스스로를 끊임없이 평가하게 만드는 구조라는 것.
하지만 나는 이제 믿는다.
매일 아이와 눈을 맞추고,
매일 사소한 질문을 나누며,
함께 걱정하고, 함께 웃으며,
아이와 ‘지금’을 살아가는 부모가
언제나 가장 좋은 부모라는 것을.
그러니,
혹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조용히 나와 함께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면 좋겠다.
#4. 메타인지보다 먼저 필요한 것
매주 금요일, 당신의 노력에 말을 거는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