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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나를 고요하게 만드는 곳

나다운 나를 기억하게 하는 장소들

by 루미 lumie


가끔, 여행지에 도착하자마자

‘도착했다’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낯선 공기인데도, 숨이 편하게 쉬어지고

처음 걷는 골목인데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길 같을 때.


그런 나라들이 있다.

나에게는 일본이 그랬고,

독일과 북유럽이 그랬다.



그곳에 있을 때면, 마음이 평평해졌다.

어떤 긴장도, 설명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그저 조용히,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던 시간들.


나는 작고 조용한 불빛 같은 사람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것보다,

오래도록 은은하게 머무는 따뜻함이 좋다.

많은 말보다, 조용한 응시가 어울리고

복잡한 감정보다, 맑은 침묵이 내겐 편하다.


그런 나에게 일본은 이상할 만큼 익숙한 공간이었다.

좁은 골목, 나무창틀에 닿는 바람, 다다미 향,

낮게 깔린 목소리와 조명,

그리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공기.



매번 도착할 때마다

어딘가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것 같았고,

그 기억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몰라도

그냥, 괜찮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돌아올 때마다 늘 ‘다녀왔다’는 말보다

‘다녀왔던 것 같다’는 말을 더 자주 쓰게 된다.



독일과 북유럽은 나의 선을 알아봐줬다.


어릴 땐 몰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알게 된 나의 기질.

정돈된 구조, 단정한 실루엣, 군더더기 없는 구성.


독일과 북유럽은 그런 면에서 참 고요한 나라였다.

감정이 들뜨지 않아 오히려 편안했고,

절제된 색감과 질서 속에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곳의 자연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깊었고,

도시의 리듬은 빠르지 않았지만 정직했다.

거기에 있는 나 자신이, 가장 나답게 느껴졌다.



프랑스는 매년 갈 때마다 좋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낯설었다.


프랑스는 화려하다.

감각적인 디테일, 예술적인 분위기,

걷기만 해도 영감이 차오르는 거리와 빛.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너무 벅차서,

한 발짝만 더 깊이 들어가도

마음이 자꾸 흔들렸다.


그곳에서는 나 자신보다 그 풍경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오래 머물면 스스로가 조금 작아지는 기분도 들었다.


나는 아마, 너무 아름다운 것을 마주할 때

조금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쪽이

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디가 좋다’고 느끼는 건,

그 장소 자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을 때,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느낌.


어쩌면 고향이라는 건

나를 편안하게 비추는 공간이 아닐까.


그곳에 있으면

어디까지가 내가 되고,

어디부터는 세계가 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곳.


그렇게 생각하면,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나 자신을 조용히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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