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사천씩, 가만…… 일 년에 그니까 사억이 넘어?"
통장을 넘겨보던 금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통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드레스룸에서 막 나온 지영을 부러움과 감탄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영아, 그 옷 너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
"그래?" 지영은 거울을 쳐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S백화점 아르마니 매장 매니저가 익숙하게 마지막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자, 지영이 눈짓을 하며 말했다.
"저 베이지랑 블랙으로 같이 주세요."
"고객님, 머플러도 좀 전에 무척 잘 어울리시던데요. 같이 넣어드릴까요?"
"그래요."
지영과 금희는 센트럴시티 안에 있는 S백화점 2층 명품매장에서 나와 지하층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은 후, 근처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 유학까지 다녀와 예술만 하던 네가, 어떻게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투자회사에 다닌다니? 기업투자 분석과 기업들의 회계컨설팅이며 주식이동과 가업승계, 기업공개인 IPO 증권사 업무까지 하니? 물론 전문가 영역은 네 말대로 각 전문가들과 서로 연계해서 한다지만."
"그러게, 말하자면 좀 길어. 정말 아이러니한 게 난들 이러리라고 꿈에서도 상상이나 했겠니? 이것저것 원래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서 한 곳을 오래 파지 못한 것도 있고."
"그렇구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내키면 해줘."
"그럴게. 홍대에서 미술학원을 하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서 우연히 영석이를 만났어. 9호선 신논현역에 있는 교보문고에서. 영석이는 원래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증권사 IB업무로 옮겼거든. 그런데 그 팀 본부장이 골드만삭스 한국법인 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영석이를 같은 파트너로 데리고 간 거지. 그래서 영석이가 업무상 투자 회사들을 많이 아는데, 여차여차해서 그중 한 회사를 나에게 소개해줬어. 기업이 사이즈도 크고 보람이 있더라. 이 업계에 발을 담근 지 벌써 8년째네."
지영은 캐모마일 차를 한 모금 더 음미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곳 CEO들과는 달리 우리 회사 수장은 현장감각과 이론실무에 능통하시고, 같은 업계에서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는 알아주는 대가시거든. 그건 너도 아니까 날 찾아 이렇게 만난 거고. 열심히 한번 해봐. 너 정도 기업 경력과 눈빛이면 나보다 훨씬 더 잘할 것 같아."
금희는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고맙다며 의자를 바짝 더 당겨서,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으로 지영의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지영은 새삼스럽다는 듯 애정을 담은 부드러운 눈길로 살짝 바라보며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되기는 네가 내 통장을 봤듯이 돈도 많이 벌고, 그만큼 일만 하며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살고 있지. 우리 일이 큰 기업의 CEO들을 많이 대하고, 또 그분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갖고 계시기에 대화하다 보면 재미도 있어. 다만 업무강도나 밀도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도 너의 회사에 입사가 가능할까? 같은 금융이라도 분야가 달라서 그래. 이 업계에서 십 년을 넘게 근무했지만, 지금은 S사 사내에서 기업 분석과 교육만 담당하거든."
"괜찮아, 너 정도면. 좋은 자리는 원래 인맥으로 먼저 채우잖아. 그 나머지를 공개채용하고. 우리 회사가 구조적으로 완벽한 지원을 해주고 시스템까지 잘되어 있어서. 가장 많은 예산을 직원 개개인의 능력 강화를 위해 아낌없이 쏟아붓거든. 내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현재보다는 회사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고속 수직 성장을 해서 지금은 계열사도 각각 분리되어 여러 개 있고, 사내에 각 분야 고문들을 비롯해서 회계사, 변호사들은 물론 세무사가 수천 명이 넘어."
지영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배어났다.
"우리가 하는 주 업무가 기업 재무제표 분석에서 재무 분석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그 안에 많은 해법의 실마리가 들어있거든. 처음엔 좀 낯설어도, 하루에 열 군데도 넘는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고 실제 미팅에서 CEO의 가치관과 기업비전, 구체적인 질문이나 사정 등을 들으며 몇 년이 지나면, 스스로 신기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업체 보는 눈과 세세한 정보를 분석하는 안목이 자연스레 생기거든."
지영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보이는 숫자 몇 개로도 많은 것을 유추해서 면담하다 보면 상대 CEO가 의아해하고 감탄하시는 분들도 많아. 더구나 공무원처럼 오후 5시면 공식 업무가 끝나는데, 그때부터 기존 자료와 면담을 바탕으로 각 해당 전문가들과 다음 미팅 준비 연구나 자료 등을 검토하다 보면 매일 새벽퇴근은 기본이야. 이런 세월을 집중해서 몇 년 이상 하면 같은 전문가라도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오히려 답답해 보일 때가 있어. 통합적 사고를 잘 안 하고 사지선다형 안에서만 해답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살짝만 문제가 비틀려 보이면 당황하고 창의적 사고를 잘 못하니까."
금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그리고 하다 보면 현장 감각이 생겨서 업무가 점점 재밌어지거든. 중견기업 이상은 재무제표가 공시되어 있고 중소기업은 기업재무제표 신용정보원에서 보게 되어있어. 우리 업계 업무가 보상도 크고 경쟁력이 있는 이유가 좋은 투자는 서로에게 원원이 되고 도움도 주니까. 또 우리나라 중소기업이나 중견 업체가 매출 천억이 넘고 영업이익 백억이 넘어도 제대로 된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가를 사내에 배치해서 고용하기는 힘든 구조니 안목만 있으면 여러 파생되는 일이 많아."
지영의 설명은 계속됐다.
"실제로도 업체를 방문해 보면 부장이나 이사가 주먹구구식으로 기업리스크나 투자유치 등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 또한 중소기업은 재무제표 순이익이 1억이 조금 넘는 업체가 대다수여서 연봉 일억이 넘는 전문 인력을 배치하기는 가능성이 희박해. 그러니 오너가 기업을 열심히 운영해서 뼈 빠지게 벌어도 리스크 관리 한 번만 잘못해도 업체가 날아가는 수가 많거든."
"실제로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이 수출로 먹고살잖아. 한때 중소기업을 환율 헤지 해준다고 은행에서 권유한 '키코'라는 금융상품 유행으로 중소기업들이 멋모르고 가입했다가 소송까지 하고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고 망하거나 몇 년째 겨우 연명하는 업체도 많았어. 담당자는 압박감의 고통과 책임감으로 자살까지 하고. 은행에서 권유하니까, 더구나 환율위험을 헤지 해준다고 하니 믿고 사인했다가…… 내가 담당한 업체 중 하나도 키코로 800억 넘게 손실을 보고 휘청휘청했었거든."
지영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백 가지 기업의 각각 다른 백 가지 넘는 고민을 듣고 투자를 검토하고 좋은 기업에 투자를 하고 하는 건 보람 있는 일이야 우리 입장에서는 쉽게 해 줄 수 있는 일도 중소기업 같은 입장에서는 크게 고마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 내 생각에 우리 일이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개성에 맞고 만족한다면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해."
지영이 금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께서 원래 섬유 관련 회사를 운영하지 않으셨어?"
"응, 맞아. 요즘은 규모를 확 줄이고 지금은 여성 브래지어에 들어가는 부속품 납품을 하는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시는데, 주요 매출을 담당하는 굵직한 납품업체가 문제가 좀 있어 힘드신가 봐."
"그렇구나, 나도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그런 상황이 뭔지는 알겠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각자의 상념에 잠겼다. 스피커에서는 캐나다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의 중후한 목소리가 사라지고 이어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실내를 압도했다. 누구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위안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지영은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며 소사처럼, 반 고흐처럼 자기 본성대로 자기 개성에 맞게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금희의 내밀하고 열정에 넘쳐 반짝거리는 눈빛과는 대조적으로 지영은 몸도 마음도 피로와 과중한 업무에 살짝 지쳐있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한 옷이라도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고통이고 병이 되는 듯, 그녀의 무의식에는 다른 갈증이 있었다. 지영은 문득 '나를 붙잡아 얽매는 건 무엇인가'를 스스로 자문했다.
전 세계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마음껏 붓과 펜으로 하루를 보내고 읽고 싶은 책도 무한정 볼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이 그리웠다. 작업을 할 때면 오직 캔버스에서만 나는 사각사각거리는 소리와 절대 고요, 간간이 들려오는 싱그러운 새소리의 반향만이 무아지경 몰입의 그 순간들을 간혹 의식하게 깨웠다.
지나간 순간들을 회상하며 은은한 열망이 온천수 솟구치듯 오르다 현실적인 이성의 목소리에 잠잠해지며, 지영은 의식적으로 큰 한숨을 삼켰다. 맞은편의 금희는 뭔가를 수첩에 써 내려가며 손과 온몸의 자태에 생기가 가득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