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녹 채 02화

2화 투명한 숫자 뒤편의 그림자

by 크리슈나


유종은 아버지가 가구 회사 CEO로 큰돈을 벌었고, 그의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한 고관대작의 딸이었다. 부모님이 예술을 좋아해서 많은 골동품과 예술작품을 젊었을 때부터 꾸준히 사들였고, 몇 년 전에는 인사동의 이름난 전통 있는 화랑까지 인수해서 어머니와 큰 형수가 운영하고 있다. 굵직한 회사들과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주변의 거부들이 많았다.


유종은 회계사가 된 후 회계법인을 차려놓고 넓은 고급인맥으로 요즘 같은 불황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학 때부터 양성애자였던 그는 행동반경도 넓고 운동능력 등 체력도 친구들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건장하고 좋다. 키 크고 근사한 미남에 든든한 재력까지 갖추고 머리까지 받쳐주니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유쾌남이다.


그런 유종에게 언제부턴가 미묘한 설렘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회계감사 업체 중 한 곳인 중견 게임업체 김 회장이 불러서 동행한 골프에서 처음 만난 지영이 자꾸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안성 골프장에서 특별히 긴장되고 즐거웠던 그날의 라운딩을 끝내고 사우나를 하고 나온 그녀를 골프장 로비 프런트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였다. 지영은 도표 중 곡선의 아름다움과 함께 직관적으로 시각적 만족을 주는 기하학적 육체의 조화를 코발트 다크블루 정장으로 적당히 가렸으나, 그 모습이 유종에겐 어딘지 모르게 묘한 신비감을 주었다.


유종은 스쳐 지나가는 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리호리한 실루엣이 지닌 생기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함께 잘 어우러진 모습을 삼켰다. 마치 자연스러운·.' 살 붙음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듯 그늘집에서 지영의 털털한 먹성과 대화 중의 재치 있는 유쾌함이 가끔 생각이 났다. 그 후로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몇 번의 만남을 가졌고 서로 잘 통하는 면도 많았다.


그런데 최근엔 지영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번 연락을 했는데 흐지부지 못 만난 것이다. 불길한 징조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눈빛은 어딘지 좀 우울해 보였는데 걱정도 살짝 됐다. 그녀는 늘 알 듯 모를 듯 양파 같은 구석이 있었다. 양파처럼 겹과 결이 많다.


지영의 탄력 넘치는 흰 피부는 유종의 유독 까맣고 각질이 잘 생기는 피부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 주눅이 들게 했다. 때로는 화려한 별장이나 외딴 쓸쓸한 오두막 같기도 하고, 아름다운 최신 오페라 의상만큼 개성 있고 미묘한 그녀를 읽는 법을 배우는 건 꽤 까다롭다. 하지만 유종의 부드러운 감상의 선과 사랑의 안내도를 따라 지영은 차가운 듯 적절한 반응을 했다.


'나에게 반응하지 않는 곳은 그녀의 뇌 회로가 꺼진 부분이야. 다행히 그녀의 사고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어. 부드럽고 다정하긴 한데 문제는 내가 다가간 만큼 내게 오지 않는 게 문제지.'


유종은 5월의 지옥 같이 바쁜 종합소득세를 끝내니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났다.


'바보같이 이 무슨 생소하고 비통한 심정이람?…… 이럴 때를 대비해서 토끼 굴을 두세 개는 기본으로 유지하고 파놨어야 하는데.'


너무 바쁜 건 핑계고 용서할 수 없이 게을렀다고 생각한 유종은 최근 바꾼 페라리 캘리포니아 T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무심코 머리를 찧다가 '윽' 하고 목을 감쌌다. 그는 회계법인 명의의 업무용 세단보다 최근 뽑은 자신의 페라리 스포츠카를 더욱 즐긴다.


그나마 한국의 정서를 생각해서 가끔 스포츠카를 타고 업체미팅을 가는 날은 해당업체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않고 멀찌감치 세워두고 걸어 들어간다.


'이걸 타고 나갔을 때 사람들과 특히 여자들의 눈빛은 나를 더욱 흥분시키고 거인이 되게 하지. 이 정도 불편함 쯤이야 얼마든지 애교로 감수한다고.'


다 좋은데 유종에게 스포츠카는 세단보다는 뭔지 모르게 몸이 불편한 것이 딱 하나의 흠이자 불만이었다.


***


2년 만에 지영과 연락이 닿았다. 오랜만에 반포 한강에서 바람이나 쐬자고 해서 저녁 6시쯤 만났다.


"유종! 잘 지냈어? 많이 달라졌다. 살이 좀 붙은 것 같기도 하고."


"지영이는 늙지도 않는 것 같아, 여전히 예쁜데."


"그래? 기분 좋은데. 배고프지? 손이 왜 이렇게 차, 남자가?"


"차 안에서 계속 에어컨을 켜고 있어서 그렇지. 머리 했어?"


"머리? 그냥 뭐 항상 비슷한데."


"비슷하긴? 항상 단발머리에서 지금의 달달한 살짝 긴 부드러운 웨이브는 대변신이지!"


"흐흐, 쑥스럽게…… 유를 위해서 난 좀 일찍 도착해서 한번 둘러보고 좋은 카페도 알아놨지."


"난 여기 처음 온다. 진짜 반포로 이사 온 지 2년 됐는데도 말이야."


"원래 그래. 김밥 사 왔는데 음료수랑 같이 먹을래?"


"응, 지금 이 시간의 한강변이 날씨가 너무 시원하고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역시 탁월한 선택이야. 강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잖아. 나 살쪘어?"


"너? 많이 안 쪘어. 저쪽으로 가자. 거기 가면 음료수도 있고 파라솔에 잔디도 있고 좋잖아."


유종과 지영은 나란히 걸으며 한강에 늘어서 있는 현대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을 지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지영은 참깨라면을 한눈에 찜하고는,


"라면!"


"라면? 아…… 그래, 그래. 국물이 있어야 하니까."


함께 라면과 감자 칩을 사서 편의점에서 펼쳐놓은 파라솔 나무의자에 사이좋게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엄청 바빴어. 널 못 보는 사이 더 많이 바빴다. 일이 많으니까."


"넌 뒤에서 밀어주는 데도 많잖아."


"어, 다 지인들 소개지 뭐. 표정이 평화로워 보여."


"나? ㅎ~"


"다행히 차가 많이 안 막혀서 내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십 분 정도 늦었어. 나는 이렇게 늦게 끝날 줄 몰랐어. 오너가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답도 안 나오는 걸 가지고 계속 붙들고 늘어지니까."


"아산에 무슨 회사인데?"


"건설."


"건설? 요즘 경기가 괜찮지 않을 텐데?"


"그렇긴 한데, 나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경기가 괜찮은 사람들이야. 돈을 벌어야 세금을 내니까."


"그렇긴 하지. 자본주의에서 기존의 필요한 건설물이나 상품이 없어서 다시 만드는 건 아니잖아. 더 좋은 디자인과 편리성, 세련됨을 내세워서 비싼 가격에 팔고 기존에 갖고 있던 아파트나 상품은 다 싸구려 골동품으로 헐값에 버리는 게 생리잖아. 서울의 아파트는 재건축이라도 하지만 지방은 심각해. 공급이 넘쳐나도 계속 짓거든. 패션 시장의 유행도 그래서 만든 거고…… 현대인이 목숨처럼 들고 다니는 족쇄 같은 핸드폰도 같은 메커니즘 아냐?"


유종이 김밥을 먹으려다 실수로 터트리자, 지영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 왜 자꾸 김밥 옆구리를 터트리니? 먹기 싫어서 데모하는 거야? 이왕이면 좀 예쁘게 먹지. 젓가락질 똑바로 해!"


"내가 먹을 건데 나라고 김밥 옆구리 터트리면서 먹고 싶겠니? 나쁜 남자 좀 좋아해라."


"나쁜 남자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어? 너도 생각을 해봐!"


"왜? 나름대로 매력 있다."


"나름대로 매력 있으면 뭐 해? 그게 끝인데. 인간은 있지, 결국에는 인간성에 끌리는 거야. 다른 거는 순간뿐이고 다 지나가는 거지. 나쁜 남자는 잠깐 호기심이고. 잠깐 호기심에 던져져서 잊히고 싶어?"


"갑자기 굵은 소나기 목소리로 말 끝났나?"


"아니요." 지영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먼저 하세요, 양보할게요."


"나쁜 남자라는 게 처음엔 나쁜 남자인데, 반전의 매력이 있는 게 나쁜 남자야."


"아 그래? 요즘 나쁜 남자의 정의가 그렇게 바뀌었어?"


"뿅 간다니까."


"아 진짜? 그럼 그 반전의 매력이 뭔데?"


"알면 반전이 아니지."


"그래? 나쁜 남자답네. 말하는 거 보니까."


"하하하! 뭐 또 하수같이 그래 엉?"


"엉? 그런 거 몰라 나는. 아~하 그런 거 야한 거 말하는 거야? 식스 팩 이런 거?"


"하하~ 어어"


"울퉁불퉁 근육 그런 거? 얘들이 찾는 거?"


"그건 아니고"


"그럼 뭐야?"


"요가를 최근에 2년 정도 빡 세게 했거든. 자세히 보면 알 거거든."


"오호, 근육운동은 근육이 울퉁불퉁 나온다고 해. 요가는 뭐가 좋지? 남자한테?"


"아우~ 근육운동 그거는 보기만 좋지 실익이 없어. 요가는 내부근육하고 다르더라고, 유연성하고."


"아 그래? 남자한테 유연성과 내부근육이 좋아지면 어떻게 되는 거야?"


"알고 싶나?"


둘이서 마주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신나는 음악소리와 함께 한 서른 명의 젊고 발랄한 이삼십 대로 보이는 마라톤 팀이 힘차게 앞을 지나갔다.


"그래서 2년 동안이나 끈기 있게 요가를 했단 말이야?"


"최근에 좀 빠져 있었던 게 요가였다고."


"음, 참 특이해. 남자가 요가에 빠지는 게 쉽지 않아. 그렇지? 너의 이미지만 봐도 그렇고."


"점점 추세가 강남을 필두로 남자들이 요가를 많이 하는 추세야."


"그러니?"


"좋은 것 아냐?"


"그렇지, 사실은 여자들이 아무리 좋다고 남자한테 권해도 안 하는 것이 요가 아니야? 원래는."


"가면 여자밖에 없으니까 창피해서 그렇지 뭐."


"아 그렇지. 요즘엔 세태가 바뀌어서 오히려 예쁜 여자 쳐다보며 운동하는 그 상황도 좋은 거지? 좋은 호르몬도 막 솟고."


"그렇지, 그렇지. 요가는 원래 좀 했었고 해외사업을 좀 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단 거기 거래처들이 있어가지고."


"아, 기존 회사의 일을 봐주면서 진출하는 거야?"


"어어, 부동산도 좀 샀고."


한강의 저녁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갔다. 지영은 라면을 후루룩 먹으며 유종을 바라보았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 사이에 쌓인 것들과 변화한 것들이 이 순간 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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