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나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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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커다란 화면의 다이어리를 점검하며 화요일 미팅을 떠올렸다. 일원동에 사무실을 둔 중동 플랜트 건설업체의 M&A, 그리고 자회사 주식소각 문제로 H와의 접촉이 필요했다. 다른 금융회사도 많았지만, 그동안 두 회사 사이에 쌓인 인연과 신뢰 때문이었다.
H를 처음 만난 건 (주)일성 연료펌프 주차장에서였다.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쓸어 올리는 그의 모습을 지영이 보았다. 순간, 그녀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 마주침이 그녀의 몇 년을 붙들 줄은 당시에 상상도 못 했다.
시각이 인간에게 독립적 기능이 아니라 빛의 기능에 의존하듯, 예정된 운명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고대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한 클리나멘—원자들이 우연히 빚어내는 예측 불가능한 만남—이 일어난 것일까.
그날 두 시간 넘는 미팅에서 지영에게 남은 건 그가 회의 도중에도 웨이브 앞머리를 간혹 쓸어 올리던 모습뿐이었다. 늘 업무상 딱딱한 사람들만 만나던 그녀에게, 그의 색다른 모습은 억눌러두었던 묘한 감성을 자극했다. 그동안 너무 건조한 생활을 했나 보다 싶어 무심히 넘겼고, 그 후 두세 번 더 업무상 만났지만 H를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업체 미팅 때문에 예정된 화요일, 지영은 1년 만에 H를 다시 만났고 점심까지 함께했다. 식사 도중 H는 다음 주 저녁식사를 제안했고, 지영은 싫지 않아서 응했다.
지영이 H에 대해 아는 것은 S대 출신에 초고속 승진, 든든한 뒷배경이 있다는 소문뿐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일상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저녁을 함께한 그날, H는 지영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저녁 내내 재기 발랄한 웃음을 선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사려 깊게 그녀를 배려했다. 청담동의 근사한 와인 바에서는 이루마의 서정적이고 달콤한 피아노곡 'Love me'를 직접 연주해 들려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지영은 깜짝 놀랐다. 라이브 연주라 그런지 몇 배의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마추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곡의 느낌을 살린 연주가 끝나자, 홀 안의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지영은 온몸을 감싸고 있던 자신의 유리장막이 자기도 모르게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H는 재능과 장점이 많은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지영과는 근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 가끔 논쟁이 붙으면 좁혀지지 않는 간극으로 서로를 힘들게 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사랑은 잔인한 면이 있어서, 모처럼 지영에게 찾아온 꿈같은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을 거 같았다.
언제가 사람이 떠나도 추억은 남을지도 모른다, 지영은 그때 들려준 피아노곡을 언제까지고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가끔 그 곡을 일부러 들을 때마다 처음 그 감동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아련히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지영은 H가 가끔 생각났고, 그가 들려준 이루마의 '러브미'를 자기만의 감성에 맞게 쉽게 편곡해서 혼자 있을 때 어릴 적부터 취미로 배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며 복잡한 심경을 달랬다.
그렇게 예고되지 않았던 감정의 파동은, 끝내 유리장막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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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후, 지영은 자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예전처럼 매끄럽게 처리되던 업무들이 자꾸 걸렸고, 완벽하게 통제되던 일상에 예상치 못한 틈들이 생겨났다. 마치 정교한 기계의 부품 하나가 느슨해져 전체 시스템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것이 H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던 무언가가 H를 계기로 드러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한 번 깨진 유리장막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늦은 밤, 바이올린을 든 지영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H의 '러브미'를 편곡해 연주할 때마다, 사실은 자신만의 새로운 곡을 만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멜로디는 이미 그녀 안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슬픔도, 그리움도, 심지어 분노까지도 하나의 선율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영은 깨달았다—만남과 이별 등과 상관없이 사람은 계속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음악이 때로는 원곡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