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녹 채 04화

4화-잃어버린 이름의 서랍

쇼윈도에 갇힌 삶의 실밥

by 크리슈나


사람은 계산 끝에 고른 말보다, 잊고 있던 말 한 조각에 진심을 쏟는다. 무심한 말이 흘러나오는 순간, 가면의 무늬가 그만 벗겨지는 것이다. 누구나 의식적인 꾸밈말보다는 무심코 한 말에 진심이 드러나는 법이다. H는 지영과 가까워진 후 어느 날 차 안에서 무심코 자기는 ‘세상의 어떤 여자라도 세 번만 만나게 해 준다면 다 자신 있다’고 했다. 온갖 정성을 다 바치더니 H는 순간 자만심에 우쭐한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심결에 실수를 했다. 본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대한 비즈니스에서나 정치에서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중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일이 끝났다고 한 박자 당겨 기분 좋게 샴페인을 살짝 일찍 터트려서 그간의 노고를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범인(凡人)들이 다수인데 고만 고만한 인간들의 습성이라고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지영은 위로했다. 그 후로 지영도 모르게 H가 점점 싫어졌다.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나 처음에 좋아했던 바로 그 이유가 돌이켜보면 싫어지는 이유도 되는 절묘한 상황이었다. 그가 쓰는 단어는 간혹 외설적이다 못해 원초적인 경악을 드러냈고 특히 무심코 한 말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후로 지영의 마음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H로부터 멀어졌다


사람의 깊은 내면의 실재를 마주쳤을 때 아름다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매우 드물 것이다. 식물은 가까이 가면 향이 나지만 인간에게서는 대부분이 악취가 난다. 지영은 퇴근시간에 H가 회사 근처에서 기다리면 초조함과 설렘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다음 미팅 준비도 완벽히 해놓지 않고 뛰는 걸음으로 달려갔던 자신이 싫어졌다. 냉정하게 자기를 돌아보며 늦은 시간까지 업무만 하는 생활도 지쳤고 또한 다른 직종에 비해서 괜찮은 물질적 보상이 따라와도 지영의 마음을 진정으로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더구나 강도 높은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까닭 모를 하혈이 매일 조금씩 있었고 생리통도 점점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 분야의 최고의 의사를 찾아가도 원인도 병명도 별다른 처방도 내려주지 못해서 곤혹스럽고 걱정도 되었다. 점차 마음의 공허감은 깊어갔고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영은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남들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타인과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깊은 공감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자신과 타인들을 들여다보며 여유를 갖고 사색을 즐기며 살아봤는지 세월을 더듬어보니 처절하게 고통스러웠다. 일상이 매일 똑같았고 정해진 딱딱한 생활로 인해 자신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그럼에도 스스로 안주하는 것이 한없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즐길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서 유일하게 지영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강박증적 소비로의 도피가 그나마 순간적인 보상이나 즐거움을 주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쇼핑에서 1초의 시간을 아까워한다. 여전히 자신과 타인에게도 관심을 주는 것도 힘들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영은 마음과 정신의 회로가 계속 옥죄였다. 이제는 오그라 들대로 오그라든, 감정의 불구처럼 느껴졌다. 그 감각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단호하고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던 자신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고 차츰 그녀의 내면에서는 자아의 깊은 균열이 속에서부터 서서히 갈라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틈새를 끝내 외면했다. 삶은 쇼윈도에 진열된 옷이 아니다. 아무리 고르고 꿰매고 다듬어도, 그녀 안의 실밥 하나가 날마다 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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