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연극에서, 모든 등장 인물들을 주연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 인생이란 연극엔 단 한 명의 엑스트라도 없어요.. 우리 모두가 각자 삶에 있어서 주연이죠. “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에 내던지는 구원, 당신은 어떤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인생이란 한 편의 연극이다.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무대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에선 자신이 중심이지만, 또 다른 이의 삶에서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남을 테니 말이다. 삶은 그렇게 연극이란 무대 위에서 겹겹이 쌓이고, 해체되고, 다시 세워진다.
영화 < 시네도키, 뉴욕 > 은 그 겹겹이 쌓인 무대 위에서 자신을 찾으려, 그 연극을 완성시키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 연극 속 주인공인 케이든은 자신의 삶을 거대한 무대 위에 재현하고자 한다. 시간의 흐름은 무대 위에서 파편화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는 무너진다. 그가 세운 도시는 이를테면 현실의 복제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보다 더 ‘실재’에 가까워지게 된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케이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들의 삶은 그들에 의해서 다시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케이든은 창조자인 동시에 방관자가 된다.
< 시네도키, 뉴욕 >을 조금 더 이해해 보자면 우리는 내연과 외연의 개념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 케이든이 자신의 삶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그 거대한 무대는 그의 삶의 외연을 확장하는 상징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대는 점점 더 커지고, 복제된 도시도 확장된다. 그의 주변 인물들, 배우들, 그리고 끊임없이 추가되는 그 연극 속 ‘ 연기자 ‘ 들은 그가 만들어낸 세계가 외연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그의 연극은 그 자체로 외연을 무한히 확장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케이든의 내연이다. 케이든의 내연은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 상실, 후회와 같은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재현하고자 하지만, 그 재현은 결코 현실과 완전히 같을 수 없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의 연극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타인이 되어보는 그 경험들은 내연적 탐구로 볼 수 있다.
무대가 커질수록, 그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케이든이 확장한 세계는 점점 더 거대해지지만, 그 거대함만큼 그의 실존은 더욱 작아진다. 마치 그의 삶은 무대 위에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연극처럼 반복된다. 케이든이 자신의 연극을 확장하면서 겪는 내면적 혼란은 점차 증폭된다. 그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삶을 재현하고자 하지만, 그 재현이 거듭될수록 그는 점점 더 현실과 멀어지는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의 연극은 시간을 왜곡하고, 기억을 파편화하며, 사람들을 복제해 낸다. 하지만 그가 연출하는 삶은 결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내연은 더욱 복잡해지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면서 그의 내면 세게는 점차 충돌로 인해 해체되어 간다. < 시네도키, 뉴욕 >의 아이러니는 이러한 외연과 내연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다. 케이든은 외연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지만 그 확장은 그의 내연 ( 자아의 본질 )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그렇게 그의 삶의 연극은 끝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삶을 둘러싼 사람들, 그가 엑스트라라고 생각했던 이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자신의 상처, 두려움 같은 내연적 요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는 밖이 아닌, 안에 있었다. 결국 그가 확장하고자 했던 외연의 무대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내면 속 공허와 나와 ‘ 타인 ‘ 사이에 알 수 없는 공백을 더욱 선명하게 그려낸다. 그 공백은 ‘ 나 ‘ 는 나로 살아기에, 내가 주연인 연극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시네도키, 뉴욕>의 촬영 기법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시간의 왜곡과 공간의 확장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리고 플로베르적 시간에서 프루스트적 시간으로 넘어가는 지점은 이런 경계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며 케이든의 내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의 초반부는 비교적 일상적인 카메라 워크와 안정적인 앵글로 시작된다. 그러나 케이든이 자신의 연극을 무대 위에 재현하기 시작하면서, 카메라는 점차 복잡한 동선과 왜곡된 구도로 변화한다. 현실과 무대가 겹치는 장면들에서는 롱테이크와 와이드샷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며, 인물의 작은 움직임조차 무대 전체에 반영되는 모습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기법은 케이든의 삶이 무대에 흡수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클로즈업의 사용은 인물들의 내면을 파고드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케이든의 얼굴에 드리운 깊은 주름, 클레어의 흔들리는 눈빛, 헤이즐의 불안한 미소 등은 인물들이 느끼는 시간의 압박과 삶의 무게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는 단순히 배우의 연기만이 아니라, 카메라가 그들의 삶을 응시하는 방식을 통해 극대화된다.
자 그럼 이러한 비극적인 연극 무대 속 구원은 어디서 찾아오는가? 케이든이 마지막에 발견하는 것은, 결국 그의 연극이 자신이 아닌 타인들의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내가 주인공이고 그들은 엑스트라라고 여겼지만, 그 모든 이들이 주연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그는 죽음에 다가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여기서 나는 영화에서도 언급된 도스토옙스키의 <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을 떠올린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이야기한다. ‘ 인간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해한다. ‘ 그리고 그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 모든 생명을 사랑하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저라. “ 이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우리의 실존이 드러난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다.
하이데거 역시 죽음의 지각을 통해 삶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랴. 죽음은 종착점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응시하게 만드는 커다란 거울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이야기한 '죽음을 통한 삶의 이해'는 단순한 허무가 아니다. 그것은 마주해야 할 삶의 본질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의 지각' 역시 삶의 끝이 아닌 시작이다. 우리는 죽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하루하루가 허락된 기적임을 깨닫는다. 케이든의 무대가 커져 갈수록, 그는 자신이 마주해야 할 삶의 무게를 이해한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음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연극은, 나의 독백무대가 아닌, 스쳐갔던 그 모든 주연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산이자 궤적이다.
그렇게 케이든의 연극에서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연극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무대 위에서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그 누구도 조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결국 우리가 모두 죽음으로 향한다면, 이 영화가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으로써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 어떻게 살아야 우리는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나? “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답은 하나이다. 타인을 나만큼 이해해 보는 것. 81억의 주인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내가 아닌 다른 주인공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외로운 인간들을 포용하는 것.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레비나스는 결국 타인은 먼 미지의 존재이며,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알아가기 위해 애쓰는 행동들을 우리는 다정함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나는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 너와 나는 결국 똑같다는, 인생에서 얼마 안 되는 그 진리를 말이다.
그 진리를 깨달은 케이든은 마침내 커튼콜로 달려갈 수 있었고, 그 막을 내린다. 그래서 그 죽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나. 무엇을 맞이해야 하나. 우리는 지금 당장 죽어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케이든이 죽기 직전에서야 깨달았던 그 진리를 반추한다. 케이든의 죽음은 단순히 무대의 막이 내리는 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이해하는 최후의 방식이었고, 그의 무대는 단지 연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였고, 커튼콜은 생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 깨달음 속에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오랜 시간 자신을 기다리던 듯, 그곳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케이든은 이제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그들을 엑스트라로 소비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연인 삶에서 그들과 함께 마주하는 엔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읊조린다. “ 엑스트라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우리가 주연인 삶은 특별하지만, 모두가 주연인 삶은 외롭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 시네도키, 뉴욕 > 그렇기에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 우리는 모두 외롭게 태어났잖아요…”
우리는 서로의 삶에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뿐이라도, 그들을 주연으로서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게 기댈 수 있다. 이러한 삶은 외롭다는 아이러니를 간직한 채 우리는 이 모든 타인들을, 그들을 각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포옹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볼 수 있을 때 연극은 마침내 커튼콜을 향해 달려간다. 그러고 나니, 마치 숨겨져 있던 진리가 드러나듯, 놀랍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나는 너를 바라본다. 너는 나를 바라본다. 너는 나를 미동도 없이 응시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너도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렇게 서로의 눈을 오래도록 번갈아보니 누가 ‘ 나 ‘ 고 누가 ‘ 너’인지 누가 ‘ 주연 ‘이고 누가 ‘ 조연’ 인지 알 수가 없더라. 멈춰버린 것 같은 그 짧은 틈새에서, 우리는 마침내 서로를 이해했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인간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너에게 나의 어깨를 내어준다. 사랑을 속삭인다. 그렇게 우리는 눈 감을 수 있다. 길고 길었던 이 연극을 끝낼 수 있다. 이것이 이 영화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구원이자, 삶의 본질이다.
자, 당신은 이 지독하게 외로운 인생이란 연극 속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요. 당신의 무대 위에 선 수많은 주연들을, 당신은 마주할 준비가 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