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이브 마이카>를 통해 이야기하는 구원

다만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길

by 재용



"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너의 언어를 경청하는 것이라는 걸. 영원한 타인이라는 사실이, 서로를 알아갈 유일한 길이길. 사랑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손끝에 닿지 않는 그 마음을, 수많은 표현으로 되살려내는 길이길. 다만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이 결국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길. "



영화 < 드라이브 마이카 >는 타인의 언어를 경청하는 3시간의 여정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더욱이 다가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영화에서 ‘ 경청 ‘이라는 것은 단순한 듣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고, 느끼고, 서로의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러닝타임인 3시간은 전혀 길지가 않다.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치유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 속에 완전히 침잠한다. 그곳에선 시간이 흘러가는지 조차 알 수 없으며, 그렇게 영화 속에 온전히 몰입해서 영화와 교감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선 이상하게 딴짓을 많이 했다.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대기도,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매그놀리아>와 <시네도키, 뉴욕>의 OST를 연달아 듣기도, 그냥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 영화가 지루하거나 집중하지 못한 탓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이 영화가 끝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나한텐 가끔, 아니 자주 영화가 현실보다 가까워질 때가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는 처음부터 현실의 다양한 것들을 영화를 통해 배워왔으니깐. 그래서 영화를 통해 사유하는 감각들, 넓혀가는 사고들, 교감하고 공감하는 것들이 가끔은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생명력 있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한테 유스케와 오토의 관계는 무척이나 어렵게 다가왔다. 오토는 그의 곁에 있지만, 결코 닿지 않는 거리감이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가까운 너이지만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존재라는 두려움, 그리고 그게 느껴질 때의 그 섬뜩함. 이 영화 속 오토는 완전한 ‘ 타인 ‘ 을 상징한다. 그는 가후쿠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불륜을 저지른다. 가후쿠도,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도, 도무지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없다. 이는 그 자체로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을 준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나마 ‘ 오토 ‘ 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오토가 구상 중인 이야기다. 그건 바로 남몰래 흠모하는 동급생의 집에 침입한 한 여학생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단순한 하나의 픽션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그녀가 남긴 찢어진 메모들처럼 흩어져 있었다. 오토의 삶이 투영된 하나의 기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과 남편 입장에선 그녀가 남긴 이야기는 마치 현실을 벗어난 환상처럼 이해할 수 없는 듯 보인다. 그 이야기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로 남았다.



하지만 영화 속 오토는 끝내 불륜을 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이 이야기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난 세상에서 오토의 이야기는 가후쿠가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숨결이었다. 그렇게 가후쿠는 평생에 거쳐 사랑했지만, 평생을 알지 못했던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그것만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첫 시작일 테니까. 타인은 언제나 수수께끼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그들의 언어를 포기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경청하고 이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게 '너'와 '나'를 잇는 유일한 길일 테니까.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막막해도, 그 노력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유스케를 나아가게 만든다. 오토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그의 여정은 결국, 상처 입은 자신을 구원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에서 너무나도 사랑하고 가까운 사람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공백에서 출발해, 서로의 언어로 채워 나가는 그 삶의 온정은 믿을 수 없이 따뜻했다. 이 영화의 메인 설정이기도 한, 그들이 각자의 언어로 연극을 한다는 설정은 마치 하나의 질문 같았고, 그 안에서 공명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대답 같았다.



< 드라이브 마이카 >가 특별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 자체에 구원의 가능성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윤수가 유나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며 수화를 시작했을 때, 나는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이해의 문제가 아닌, “ 너의 언어를 알고 싶어 “라는 말에 담긴 그 다짐과 가능성이 나한테도, 아니 사람한테는 필요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 몸부림이 결국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읊조린다. 중요한 건,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결국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여정이라는 것 아니겠냐고. 타인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 한 사람의 거대한 세계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댄 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종종 이야기한다. “ 왜 너는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느냐고. “ 레비나스는 이야기했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타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평생에 거쳐도,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좋다. ‘나를 규정하는 것이 '나'가 아닌 '너'라면, 나는 '너'를 이해하려 애쓰겠다. 불가능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 언어를 따라가 보겠다. '나의 언어'가 아닌 '너의 언어'로, 너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해 보겠다. 그 여정의 끝에서, 비로소 나는 나를 이해하게 될 테니까. 그게 곧 나를 아는 길이고, 너를 아는 길이며, 네가 나를 알아가는 길일 테니까. 서로 다른 언어 속에서도, 그 언어를 배우려는 노력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조금씩 닿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각자의 언어로 발화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완성되고 유나는 수화를 통해 우리한테 이야기한다. “ 어쩌겠어요. 또 살아가는 수밖에요.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그렇게 살아가야죠. “ 그렇게 유나의 수화는, 끝내 나와 다른 너의 언어가 자막을 통해 나에게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 살아가야만 한다고. “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속이 텅 빈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앞선 3시간의 여정을 지나며 생명력을 잉태했고 마침내 나에게 다가와 그 결실을 맺었다.


그렇게 나는 저항할 새도 없이 아이처럼 울었다. < 드라이브 마이카 >는 세 시간 내내 이야기를 하면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에 귀 기울인다. 서로 다른 그들의 여정이 , 끝내 이해하지 못할 타인을 탐닉하는 과정이, 각자의 언어로 완성시켜 가는 그 하나의 연극이, 너의 언어를 배우겠다는 그 다짐이,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새겨주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괜찮은 거라고 말해줘’라는 마음이 떠올랐다. 영화는 순도 높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괜찮아.”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의 내 삶이 조금은 나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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