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태치먼트 >를 통해 이야기하는 구원

세상과 분리를 선택했던 모든 이들에게

by 재용

“ Will you be my savior? “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 부서진 마음이 다른 부서진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손길이, 포옹이 한 사람의 인생을, 그 무너진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때때로 자신을 가두고, 세상과 분리되기도 한다. 그게 고통을 덜어내는 유일한 방법일 때가 있다. 너무 큰 상처를 받은 이들에겐, 상처받을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일 수도 있다. 그들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그저 두려워서. 하지만 그 분리는 곧 구원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영화 < 디태치먼트 >는 위 질문들을 조용히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을 품은 채 고독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아주 깊이 침잠한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detachment (분리)’를 택한다. 그것은 우리 몸이 지니고 있는 방어기제다.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과 세상 사이에 크고도 단단한 벽을 세운다. 이 벽은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도 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들에게 관계는 피상적이고, 감정과 공감은 깊이 스며들지 못 한 채 표면에서만 맴 돌뿐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지 않으면 다치지 않고,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하는 일도 없다. 그렇게 타인들과 분리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 속 헨리,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헨리, 그는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된 채, 스스로의 방어막을 두르고 살아간다. 그가 세운 그 두터운 벽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나, 증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 벽은 ‘ 버림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 ‘ 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렇기에 그것은 그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 방식이 된다. 그렇게 그는 누구와도 깊게 연결되지 않고, 누군가의 상처나 아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종종 그런 사람들을 보고 냉소적이다,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한다. " 차갑다고, 너는 감정이 없다고. "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뜨겁게 사랑했기에, 그 아픔도 그만큼 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견딜 수 없어서, 다시 그만큼 차가워졌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 다큐멘터리 기법 ' 이 수시로 사용되며, 이는 영화보다는 ' 헨리 '라는 사람의 삶을 우리에게 체험시켜 주는 듯하다. 그의 흔들리는 내면과 단절된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 헨드헬드 기법 ' 도 사용된다. 그에게 세상은 흔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을 잡아주는 이가 없으니깐. 카메라는 그 불안정한 삶을 그대로 반영하듯, 중심을 잃은 듯 흔들린다. 그로 인해 우리는 그의 불완전한 내면을 더욱 면밀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클로즈업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 역시 우리는 그 불안함과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또, 영화에서 색감은 청색과 회색이 주를 이루며 세상과 분리를 한 헨리의 세상이 어떤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세상과 분리된 채 살아가는 이들의 세상이 얼마나 암울했는지. 영화 내내 우울한 분위기를 띄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괜찮지 않으니깐.


그런 헨리에게 어느 날 메디슨이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세상에 버려진 듯 한 소녀이다. 그 소녀는 어떠한 연유로 헨리의 곁에 머물기 시작하고, 그의 단단한 벽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처음에는 그 균열이 불편했다. 아니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언젠가 상처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동시에 버림받을 각오를 하는 거니깐. 그래서 헨리는 메디슨이 그에게 내민 손길과 온정을 거부하고, 밀어내고 다시금 세상과 분리되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매디슨은 포기하지 않았고, 헨리도 다시 한번 누군가를 믿어보기로, 결심하면서 둘이 attachment 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헨리는 그 순간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이 따스함이, 언젠가 사라질 테니깐. 하지만 그 순간은 행복한 웃음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다. 헨리는 깨닫는다. 차단된 세계 속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내팽개쳐져도, 결국 사람에게 구원받는다. 결국 내 손을 다시 잡아주는 건 사람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실망할까 두려워서, 그래서 벽을 세우고,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벽 너머에 있는 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그것은 곧 구원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무언가가 뚫려 있다는 사실은, 곧 무언가로 다시 채워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메디슨에게, 메디슨에게 헨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서로가 깨진 조각의 일부더라도, 함께 포개졌을 때 또 다른 모양을 만들어낸다면, 우리들은 괜찮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23살의 가을밤, 발 담갔던 캄캄한 제주 바다의 깊이를 마주한다. 잔잔한 물결이 반사되던 그 밤, 차가운 바닷속에 발을 담그며, 그 깊이 속으로 내 마음도 함께 가라앉는 듯했다.


내가 원해서 분리된 것이 아닌, 세상이 나를 분리시킨다고 느끼던 밤이었지 아마. 그때 나를 건져줬던 이가 있었다면 내 삶은 더 나았을까. 우리는 모두 똑같다. 세상은 엉망이고, 미래는 캄캄하고, 모두 각자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간다. 힘들었음에도 말하지 못해 혼자 울었던 밤. 두 팔 벌리고 나를 안아주려 달려오는데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쳤던 그날. 넘치는 사랑을 받는 법을 몰라 넘치게 흘렸던 나날들. 그 우물의 깊이를 알기에 그 마음에 손 내밀 수 있다.


하지만 난 어느 하나에도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했고, 여전히 스스로 격리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괜찮아진다는 말을 믿고 싶다. 그럼에도 사랑을, 아니 사람을 다시 한번 믿어보고 싶다. 신이 버린 이들은 결국 사람이 구원할 수밖에 없다고. 너를 구원해 줄 수는 없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다시 사람의 품에 안겨 따뜻해질 수 있을까. 늘 detachment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attachment의 힘을 알려줬던 이가 있었더라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고독, 그것은 결코 부서지지 않을 거대한 바위 같았지만 같이 계란을 던져주는 이가 옆에 있기에 견딜만하더라. 수심을 몰라 흠뻑 젖었던 나비도 같이 빠져주는 이가 있어 외롭지 않다. 사람 인이 ‘ 人’ 모양인 까닭은 인간은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 했던가. 그렇게 < 디태치먼트 >는 세상과 분리되기를 선택했던 이들에게, 다시 한번 사람을 믿어보자고,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다시 누군가를 안았을 때, 너무 기뻐 눈물이 났지만, 덜컥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더 끌어안고 이야기해 보렵니다. “ Will you be my savior? "


어쩌면, 우리가 믿지 못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한 시간들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품어주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이들이 나타난다면 주저 없이 안기세요. 끌어안고 놓치지 마세요.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의 손길이 전부. 세상과의 단절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불어넣어 줄 그 사람. 곁에 있어줄 테니 마음 놓으라는 말. 시간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우리는 결국 사람에게 기대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왜냐하면 결국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누군가의 곁밖에 없으니깐요. 그렇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 마음이 전해지는 거리, 그곳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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