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리폼드>를 통해 이야기하는 구원

최악의 희망보다 최선의 절망을 통해 경유하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by 재용

“고통과 살의와 아픔이 가득한 병증의 세상에서, 스스로 그 죄를 사하는 게 최선이었던 모든 예수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드리우다.”


우리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구원은 무엇을 대가로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 구원이 최선의 절망을 경유해 도달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희망보다 나을 수 있을까요?



폴 슈레이더의 영화 <퍼스트 리폼드>는 이 간단해 보이지만 무거운 질문들에 대한 고뇌로 가득하다. 절망을 살아가는 한 인물이 있다. 그의 세상은 이미 무너졌고, 그 폐허 속에 홀로 남아서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이 인물은 그의 주변에서 ‘희망’을 전도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뜨겁게 삶을 고민한다. 이 영화는 구원을 향한 길이 반드시 희망을 통해서만 가능하지 않음을, 어쩌면 절망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지점임을 조용히 설파한다.


<퍼스트 리폼드>의 주인공 톨러는 과거의 상실과 현재의 무력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깊은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식을 잃었고, 신념은 무너져 가고 있으며, 집이었던 교회조차 자본의 그늘에 먹혀버려 그 의미를 잃었다. 그렇게 그는 매일같이 자기 몸을 망가뜨리고, 죄책감과 무력함을 일기장에 토해내며 살아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이런 절망이 드리운 삶을 살아가면서도 끝내 도덕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사투한다는 점이다. 톨러는 굽히지 않는다. 그는 세상과 싸우는 대신, 충돌하는 내면 속의 윤리와 싸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우리에게 그가 마주하고 있는 절망을 보여준다. 이 절망은 인간이 지닌 무기력함이 아니다. 더 큰 벽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좌절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균열로 가득 찬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무너진 신념 위에서조차 끝내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고독한 의지다. 그래서 그 절망은 ‘선택하지 않음’의 포기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과 시련 속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절망일 것이다.



<퍼스트 리폼드>는 극도로 정제된 미장센과 정적인 카메라 워크로 진행된다. 툴러가 앉아 있는 정면 숏, 공간의 비대칭, 영화 내내 보여주는 저채도의 색감은 그가 세상과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적인 화면 속에서 그의 내면이 얼마나 요동치고 있는지, 그 눈동자가 얼마나 흔들리는지를 우리는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 화면 속 침묵은 곧 폭발의 전조이다.


그렇게 도달하는 마지막 장면. 자신을 벌하기로 고민하고 가시가 가득한 철쇠로 자신의 몸을 조인다. 그리고 컵을 세제로 가득 채우고 마시려던 그 순간, 마치 기적처럼 메리가 나타나 그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카메라는 회전하며 그 둘의 키스를 비춘다. 클로즈업, 음악 없이 조용한 그 화면 속 우리는 이 장면이 현실인지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그 마지막 순간 속에서 결국 구원받았으니까. 누군가를 받아들였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보여줬던 절망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파괴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가야 할 이유’, ‘삶을 향한 진심 어린 투쟁’을 통과해 도달한다. 구원은 그렇게 찾아왔다.



‘최선의 절망’은 희망보다 절망이 낫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희망은, 모든 절망을 온전히 살아낸 사람만이 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 양극단에 도달해 봐야 비로소 그 깊이를 헤아린다. 끝까지 무너진 자들만이 다시 그만큼 일어날 수 있다. 끝까지 올라간 이들만이 다시 그만큼 추락할 수 있다.


하나의 산은 또 다른 하나의 산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구원은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건 끊임없는 자기 파괴와 윤리적 갈등, 죄의식과 책임의 교차점, 태어남에 대한 망설임 속에서 태어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말하는 구원은 값싼 위로나 기독교적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고투의 끝이다. 그 절망은 비극이 아닌,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존엄이고 투쟁이다.


톨러는 누구보다 신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을 자신의 삶의 위안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신 앞에 진실해지기 위해, 모든 절망을 직면하며 최선의 정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렇기에 <퍼스트 리폼드>는 신을 통한 구원이나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닌, 절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원을 말하는 영화다. 기독교적인 형식과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실존에 대해 묻고, 그 실존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절망의 순간을 ‘최선의 선택’으로 그려낸다. 이 영화는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진실하게 삶을 예배하게 만드는, 가장 윤리적인 절망의 기도문이다.




그렇게 이 영화를 보고 저는 떠올렸습니다. 그 잘못된 믿음의 결과로 더럽혀진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속죄로, 그 자신에 대한 단죄로 가시를 껴안은 채 피를 흘리던 그를 보며 저는 무엇을 느껴야 할까요. 중간이 없는 이 양극단의 세상 속에서, 천국과 지옥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아버지.... 저는 어떤 세상을 마주 보며 호흡해야 할까요? 저 성당의 더러운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길 기도해야 할까요. 선한 인간들의 머릿속에 총알이 박히는 걸 묵인해야 할까요. 당신의 피조물들이 파괴당하는 걸 그저 지켜봐야만 할까요. 그런 저와 이 세상은 너무나도 병들었습니다. 살가죽이 찢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한 목사처럼, 저도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아버지.


가시를 껴안은 그를 보며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아,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그리고 이어진 마지막 키스는 희망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두려웠어요. 최악의 희망은 최선의 절망보다 못하니까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면 희망도 없다고 하셨나요. 저는 당신처럼 그들을 대신하여 못 박힐 용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메리(Maria)를 경유하여 이루는 구원은 이 절망적인 세상 속 유일한 빛인 걸까요? “Let it be to me(그렇게 하소서)”라는 선언이 그 모든 절망의 시작이자 희망의 문이라면, 저도 언젠가 그 문을 지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피조물이 버린 일에 대해 신이 우릴 용서할까요? “그렇다” 하시면, 저도 기꺼이 그 컵을 채우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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