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님은 항상 폼을 강조한다. 당연히 복싱에서 자세가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
- 그렇게 흉내를 내고 다니면 그런 사람이 된다.
연예인이 되고 싶으면, 연예인을 따라다니면서 흉내를 내라. 그들에 대해 연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연예인이 될 것이다.
복싱을 잘하고 싶으면, 계속 복싱 영상을 보면서 흉내를 내라. 실력이 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엉성한 폼으로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없다.
야구 선수가 수천번 배트를 휘두르는 이유도 자세를 잘 잡기 위해서다.
간혹 관장님이 보여주는 시범은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폼이 빠르고 간결하다. 역시 월드클래스.
항상 폼을 강조하는 관장님은 체육관 시설이 엉망인데도 명품을 두르고 있다.
금목걸이, 금팔찌, 금시계, 휴대폰 케이스 테두리까지도 금박이다.
입고 다니는 옷도 유명 메이커다. 운전하는 승용차가 볼보다. 옷, 신발, 심지어는 모자까지 선명한 이니셜이 박혀 있다.
일반적으로 체육관 관장은 헐렁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돌아다니는데, 신정철 관장님은 슈트에 향수 냄새까지 난다. 가끔 화려한 색상의 스카프를 두르기도 한다. 희한하게도 그 나이에 스타일이 산다.
복싱을 배우는데 그런 명품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럴 돈으로 삐걱거리는 러닝머신부터 바꿔주었으면 한다.
가장 아끼는 건 손목시계다. 역시 황금빛이 번쩍거린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독특한 자세가 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을 뻗는다. 소매가 당겨지면서 시계가 드러난다. 천천히 팔꿈치를 접어 턱 아래로 가까이 붙인다. 눈을 아래로 깔면서 별것도 아닌 것을 거만하게 중얼거린다.
“현재 시간이 일곱 시 사십 분이니까, 상담 회원이 도착하려면 이십 분 남았어.”
미트를 받아줄 때 손목에 찬 시계가 거추장스럽다. 펀치를 맞으면 그 충격으로 시계줄이 풀어지기에 관장님은 잠시 링 사이드에 놓는다.
링 사이드에는 글러브 헤드기어 줄넘기 휴대폰 등 아이들이 운동하다가 제멋대로 팽개친 기구가 놓여 있다.
미트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둘 수 없다. 체육관은 항상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는다. 휴대폰이 울려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체육관이 노는 분위기라도 기본적인 훈련은 해야 관원비를 받을 수 있다. 복싱을 배우러 나가는 아이가 집에서 원투 치는 자세는 보여줘야 부모님이 만족할 테니까.
연속으로 미트를 받고 손목시계를 든 관장님은 시계줄이 끊어진 사실을 발견한다. 롤렉스, 관장님의 허세에 의하면 시가 2천만 원이 넘는다.
관장님의 멘털이 나간다. 소파에 앉아 우울하게 바닥만 굽어본다.
명품시계는 수리하기가 어렵고, 손을 대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분명 뛰어놀던 아이 중에 누군가 밟았으리라 짐작한다. 범인을 알고 싶다. 천장에 설치한 CCTV를 확인해야 한다.
멍하게 앉은 과장님에게 슬쩍 정아가 다가와 소곤거린다. 초등학교 4학년이다.
“관장님, 그 시계요. 은영이가 밟았어요. 제가 봤어요.”
범인을 쉽게 찾은 것 같다.
고자질 이후 곧장 정아가 은영에게 알려준다.
“아까 링에서 네가 관장님 손목시계를 밟아서 줄이 끊어졌어.”
겁이 난 은영이 그 사실을 관장님에게 확인한다.
관장님의 입장에서는 어쩌겠는가, 아이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괜찮다고 넘어가려는데 은영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고자질을 한 정아, 용의자인 은영, 둘은 단짝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시간에 체육관으로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비슷한데 은영은 항상 멋쟁이 아빠가 데리러 온다.
첫인상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자상한 아빠다.
깔끔한 슈트 차림으로 들어선 아빠가 그윽한 눈으로 은영을 바라본다. 운동하거나 아이들과 뛰어놀던 은영이 곧장 달려와 안긴다.
은영의 외투를 입혀주고 사물함에서 복싱 장비를 꺼낸 아빠가 손을 잡고 나간다. 관장님에게 공손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헌신, 가정의 화목함을 그 장면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반면 정아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다.
아이들이 링에서 얼굴을 가리고 술래 잡기를 하는데, 술래가 된 정아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욕설을 뱉는다.
지나가는 불만처럼 뱉는 게 아니라 링 중앙에서 자기를 과시하듯이 고래고래 쌍욕으로 고함을 지른다. 거의 30분 동안.
그런 행동에서 재미를 얻는 것 같다. 집구석에서 부모가 저렇게 가르쳤는가.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 있는 한코치를 불러 언질을 준다.
“공공장소에서 저런 욕설은 제한해야 하는 거 아냐? 더구나 초등학생인데…….”
한코치가 공감하면서도 고개를 젓는다.
체육관에서 제일 다루기 힘든 아이라고 털어놓는다.
코치에게 서슴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복싱을 배우러 온 초기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침까지 뱉었다고 한다. 그거 고치느라고 힘들었다고.
훈련을 시키기 위해 한코치가 일렬로 세우면 먼저 정아가 반발한다.
이유는 없다. 그냥 대들고 발로 걷어찬다. 어느 체육관에도 그렇게 코치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다.
곧 은영이 동조한다. 걷어차지는 않더라도 한코치에게 다가서면서 따진다. 정아가 그렇게 대하니 친구니까 따라 하는 것이다.
항상 둘은 그런 식으로 어울린다.
나 역시 그렇지만 의외로 은영에게 호감을 가진 관원이 꽤 있다. 예의 바르게 먼저 인사하고 차분하게 행동한다.
은영은 휴대폰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아빠가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체육관에 아예 휴대폰을 들고 올 수 없다.
정아나 다른 아이들이 소파에 앉아 게임하고 있으면 은영이 혼자 한코치에게 미트를 받는다. 그래서 다른 아이는 할 수 없는 12연타를 외워서 친다.
간혹 관장님의 지시를 따라 신입회원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한다. 무척 쑥스러운 얼굴에 몸이 경직되었으면서도 명확한 자세를 보여준다.
만일 집에서 스텝을 밟으며 12연타를 치는 동작을 보여주면 부모님이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그래서 나는 정아의 고자질이 미심쩍다.
은영 아빠가 찾아온다.
샤워실로 들어가면서 한눈에 알아봤다. 관장님은 아이들과 소파에 앉아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다. 한코치는 근처 분식집에서 저녁 식사 중이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관장님과 은영 아버지 사이에 불쾌한 언성이 오고 가는 중이다. 은영은 눈치를 살피면서 정아와 같이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어떻게 체육관을 운영하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힌 관장님은 눈에 띄지 않았다. 플라이급이라 요즘 청소년과 체격이 구분되지 않는다. 은영 아빠는 외출한 줄 알고 기다리기로 한다.
그 동안 아이들은 체육관이 마치 자기 방인 것처럼 휴대폰 게임을 하며 뛰고 엎어지고 구르고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친다. 아무도 그들을 훈련시키거나 제지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없어서 이렇게 엉망이라고 여기는 중에 관장님이 아이들과 낄낄거리다가 몸을 일으킨다.
소파 뒤에서 한참 기다린 은영 아빠는 충격을 받는다. 비싼 돈 주고 내 딸을 체육관에 보냈더니 이렇게 놀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여기에서 훈련 방식은 제 권한입니다. 아버지는 참견하지 마세요. 체육관에서 계속 훈련만 할 수 있습니까? 뛰어놀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죠.”
“관장님은 뭐 하시는데요.”
“나도 애들을 놀 때 같이 쉴 수 있는 거고요…….”
궁색한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뭔가 감을 잡았는지 은영 아버지는 곧장 용건을 꺼낸다.
“관장님의 시계를 망가뜨렸다고 은영이 고민을 많이 하던데 사실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줄 끊어진 황금색 시계를 꺼낸 관장님이 손바닥에 얹는다. 조금 전 태도와 다르게 자신만만하다. 자신이 피해자이니까.
“은영이가 밟아서 줄이 끊어진 게 맞습니까?”
“친구인 정아가 증언을 했습니다.”
“그것으로 은영이가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자기 친구가 직접 보고 증언했는데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체육관에 CCTV가 설치됐을 거 아닙니까. 은영이가 시계를 발로 밟는 장면을 캡처해서 제 휴대폰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이가 한 일이니 비록 비싼 시계이기는 해도 배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은영이가 이 문제로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책임감을 기르기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반드시 배상을 해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않으면 은영에게도 트라우마가 될 것입니다. 1억이 되더라도 부모 입장에서 배상은 확실하게 해 드립니다.”
“…….”
대화가 마무리되자 은영 아빠가 손짓한다. 그때까지 자전거를 타던 은영이 달려와 아빠에게 안긴다.
체육관을 나서면서 정아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잊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관장님에게 붙들려 경비업체 직원을 기다린다. 사실 이 사건의 결말이 무척 궁금하다.
경비업체 직원은 암호를 입력하고 모니터 녹화 장면에 날자와 시간을 입력한다. 화면에서 손목시계를 벗어 링언저리에 놓는 관장이 보인다.
“비싼 시계라고 하면서 저렇게 함부로 놔요.”
타박을 주면서 경비업체 직원은 천천히 동영상을 재생한다.
링에서 관장님이 미트를 받아주고 있다. 아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손목시계 주위를 밟으면서 지나간다.
먼저 은영이 링으로 들어오고, 다음으로 정아가 올라오다가 시계를 밟아버린다.
발바닥에서 삐죽 튀어나온 시계줄이 비틀어진다.
정아는 자기 때문에 망가진 시계를 잠깐 굽어보다가 링줄을 넘는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원투 원투 신나게 미트를 친다.
은영 아빠가 다시 찾아온다. 이제 체육관에 은영은 나오지 않는다. 관장님은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한다.
“다른 아이의 짓이었어요. 확실하지 알아보지도 않고 은영에게 혐의를 씌워 죄송합니다.”
범인이 정아라고 밝히지는 않는다. 부모 사이에도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도 모른다.
은영 아빠는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가장 심한 욕이 침묵이라고 했던가.
이 체육관의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고, 은영을 피의자로 몰아간 점을 언급하며 사물함을 텅텅 비운다.
관장님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정아는 평소와 다름없이 체육관으로 나온다. 휴대폰 게임을 하고,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고, 여전히 심한 욕설도 뱉는다.
“은영이가 없어서 허전하지 않아? 둘이 친했잖아.”
내가 슬쩍 묻는다.
글러브로 한코치의 허벅지를 때리면서 장난치던 정아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정신없이 노느라고 나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왠지 이 아이가 소름이 끼친다.
“아니요. 허전하지 않아요. 오히려 마음이 편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