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된다. 그렇게 각오해야 마음이 편하다. 나이 많다고 괜한 자존심을 세웠다가 오히려 무시를 당한다.
“팔 굽혀 펴기 20회 실시!”
스무 살이나 어린 코치가 명령을 내리면 나는 고분고분 바닥을 짚는다. 미트를 받기 전에 몸을 푸는 과정이다.
팔 벌려 뛰기, 런치, 제자리 뛰기 등 코치마다 지시하는 성향이 다르지만 나는 뭐든지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마음에 들어서 하나라도 더 잘 가쳐줄 거 아닌가.
나중에 알았지만 코치들은 나이 많은 관원을 싫어한다.
훈련 지시를 내리면, 엉성하게 흉내만 내거나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코치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어물쩡 넘긴다.
“에이~ 뭘 또 그런 거 해? 이미 몸은 풀었으니 미트나 잘 받아 줘.”
아마 막내동생 같은 코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시가 듣기 싫었을 것이다.
내가 입관하기 전에 40대 회원이 두 명 있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자 노관장이 링으로 올려 스파링을 시킨다.
그들은 헤드기어를 쓰고 가장 두툼한 16온스 글러브를 끼운다. 주먹 끝으로 건드리는 정도의 가벼운 메스 스파링이라고 주지시킨다.
처음으로 링에 오르는 긴장감은 헤드기어 안의 굳은 얼굴로 드러난다.
약하게 툭툭 건드리는 정도로 시작하더니, 점점 강도가 쎄진다. 헤드기어 속 표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나는 약하게 치는데 저 놈은 쎄게 때리네.’
한 대 맞으면 어떻게든 한 대를 더 때리려고 휘두른다. 그러다가 카운터를 맞기도 한다.
1라운드 휴식 시간에 서로를 바라보면서 씩씩거린다. 한숨을 크게 내쉰다.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때리는 제스쳐를 한다. 상대방의 펀치가 강하다는 항의다. 입에 낀 마우스피스 때문에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라운드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때리는 펀치가 강해진다. 퍽, 퍽, 소리에 러닝을 뛰던 관원이 돌아본다.
드디어 한쪽이 헤드기어를 벗어던지고, 다른 쪽은 글러브를 빼더니, 서로 목을 두르면서 엉긴다. 넘어져서 뒹굴고, 그 상태로 주먹을 날린다. 제대로 맞을 리가 없다.
복싱이라고 할 수 없다. 개싸움이다.
노관장이 링으로 뛰어 올라간다. 코치와 관원이 달라붙어서 엉킨 팔다리 붙잡고 억지로 떼어낸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욕설과 발길질을 날린다. 양쪽 코너로 밀려난 그들은 마주보면서 씩씩거린다.
다행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뿐 피를 보지는 않았다.
“이게 살살 치기로 하고는 감정을 넣어서 때리네.”
링 아래에서 미트를 받던 초등학생이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나이 먹고 저게 뭐하는 짓이냐는 비난이 저절로 나올 것 같다.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체육관에 나오지 않았다.
박코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창피하다.
때문에 나는 자상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묵묵하게 행동으로 보여줘야 인정 받는 진리를 인생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시키는 대로 훈련받고, 주말에는 코치에게 음료수도 내민다.
가끔 분식집에서 돈가스도 사준다. 코치는 얼른 먹고 체육관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식사 시간이 짧다. 후다닥 먹고 일어서는 바람에 계산과 뒤처리까지 해준다.
덕분에 관원 사이에서 저 형님 괜찮다는 소리가 나온다. 복싱 기술이나 체육관 운영에 의문이 생겨서 물어보면 코치는 자세하게 대답을 해준다. 성공적인 체육관 적응기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으면 스파링에 들어간다. 사람을 세워두고 때리라고 하면, 평범한 시민이라면 여간해서 주먹을 던질 수 없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술 먹고 시비가 터졌을 때, 턱 내밀고 ‘쳐봐! 쳐봐!’ 하면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결국 주먹을 내리게 된다.
어릴 때부터 폭력에 노출이 된 경우가 아니면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때릴 수 없다.
그러기에 스파링도 단계를 거친다.
노관장은 경력자와 매치를 시켜준다.
흔히 1년 넘게 체육관에서 운동한 관원을 경력자라고 부르는데,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서로 마주 보면서 주먹을 휘두르게 한다. 직접 때리기가 어렵기에, 때리는 시늉만 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바싹 긴장한다.
어느 정도냐면 상대에게 주먹을 뻗은 뒤 다시 팔을 접어 가드를 잡아야 하는데, 주먹을 뻗은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가드 하세요, 가드!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 주먹 다 맞아요.”
지켜보던 노관장이 소리를 질러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팔을 접는다.
상대의 얼굴 근처로 주먹을 휘두르다가 살짝 맞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란다.
경력자는 유연하게 피하거나 패링하면서 나에게 더욱 자신있게 펀치를 치도록 유도한다. 자신도 그런 초보자 과정을 겪었을 테니까.
다음으로 메스 스파링을 시킨다. 일반 스파링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으로 보면 된다.
헤드기어를 써서 주먹에 맞더라도 그리 아프지 않다. 톡톡 건드리는 수준이다. 그래도 상대방의 주먹이 얼굴에 닿으면 저절로 움츠린다.
“맞았다고 쫄지 마세요. 링에서 쫄면 그것로 끝이예요.”
상대의 주먹에 당황하지 않으려고 나는 최대한 눈을 크게 뜬다.
나의 첫 메스 스파링 상대는 엄혁진, 30대 후반이다. 20대부터 복싱을 시작해서 체육관을 10년 넘게 다닌 고인 물이다.
고맙게도 혁진은 나를 잘 받아준다. 스파링 도중에 내가 주먹을 뻗을 수 있게 유도한다.
“자신있게 치세요. 자신있게, 자신있게, 약해요, 솜주먹이라 안 아프니까 더 확실하게 뻗으세요.”
덕분에 서서히 스파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다.
혁진은 중소기업 공장에서 일한다고 하는데 정확한 직종을 밝히지 않는다.
나중에 알았는데 고철상이다. 근무를 마치면 무조건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프로테스트를 받아보라는 제안도 거절한 채 저녁 시간에 자신의 복싱을 수련하는데 시간을 투자한다. 연애도 안 하고, 친구도 만나지 않는다.
간혹 여성 관원의 스파링을 받아주는 경우도 있다. 어쩔 때는 코치보다 나을 정도로 아주 착실하게 지도를 해준다.
체육관에서 경력자가 복싱 기술을 좀 안다고 여성 관원에게 개인적인 코치를 해주는 건 금지다. 벽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남성 관원의 눈빛이 살벌해진다. 휘두르는 스윙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괜히 스파링을 걸어 링에서 투닥거리는 경우도 일어난다.
오직 혁진만 여성에게 코치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운동을 마친 뒤 맥주 한잔 마시러 가자고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런 쪽으로는 소질이 없다. 복싱으로만 자신의 인생을 건 외로운 파이터라고 할까.
“왜 그렇게 살아? 여자도 만나고 좀 그러지.”
메스 스파링으로 친해지자 내가 묻는다. 아까운 남자다. 단점이라면 키가 작다. 얼굴도 잘 생긴 편이 아니고. 고철상에서 근무해서 그런지 몸은 탄탄하다.
“1년 365일 중에서 350일을 체육관에 나오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어? 여자도 만나고. 여행도 다니면서 재미있게 살지.”
“다 소용이 없더라고요.”
혁진의 대답은 의외다.
“뭐가 소용이 없어?”
이번에는 혁진은 대답 대신에 허허롭게 웃기만 한다. 그 의미가 바늘처럼 내 가슴에 찌른다.
언젠가 노관장에게 설핏 들었는데, 좋아하던 여자에게 심하게 차인 것이다. 이유는 고철상에서 일해서.
다른 계획없이 혁진은 부모님을 끝까지 잘 모시는 게 인생의 목적이다. 착실하게 적금 붓고 있으니 노후 자금은 해결할 수 있다.
뭐라고 해줄 말이 없다. 스파링 도중에 혁진의 주먹에 맞기도 하는데, 그 순간마저도 아프다기보다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여자들이 남자를 보는 눈이 삐었지. 이렇게 좋은 청년을 두고 말이야.”
농담처럼 이렇게 혁진을 추켜올리기도 하지만, 만일 나에게 딸이 있어서 결혼 상대로 고철상 직원을 데리고 오면……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