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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 안에 담긴 밀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by 수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짐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과도 같았다.

사람당 가져갈 수 있는 이민용 가방은 단 두 개.

그 안에 옷, 약, 서류, 생필품을 다 채우고 나면,

책 한 권을 넣는 일도

무게와 부피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권의 책을 골라 넣었다.

그게 시공사에서 나온 디스커버리 총서였다.


대부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게 뭐야?”라고 묻는다.


사실 나도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

유학 갈 때 엄마가 넣으라고 했다.

“미국 가는데, 미국 역사 정도는 좀 알아야지.”

그 말이 딱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뭔가 챙겨야 할 것 같긴 해서

그중 작고 얇은 책들을 골랐다.


그렇게 흑인 노예제, 남북전쟁, 인디언,

그리고 내가 원래 좋아하던 이집트나 세계사 관련 책

몇 권이 나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




디스커버리 총서는 손바닥만 하다.

A4보다 작고, 한 손에 들어오고, 얇다.

하지만 내용은 꽤나 실하다.


얇고 가볍지만 ‘정리’가 잘 돼 있다.

주제를 압축해서 한눈에 보여주는데, 초심자도,

역사 좋아하는 사람도 만족할 만큼 깊다.

게다가 사진과 시각 자료가 많아서 지루하지 않다.

주제 선택도 다양하고, 교과서 밖의 이야기들도 다룬다.



처음엔 그냥 가볍고 작아서 골랐는데.

미국에 도착한 후,

그 책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말투, 차별적인 시선, 지역마다 다른 분위기…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책 속의 문장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남북전쟁》은 단순한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이 나라가 ‘무엇을 기준으로 나뉘고, 싸우고, 타협했는가’를 알려줬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소수자’라는 단어가

얼마나 폭력적인 맥락을 품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지금 내가 겪는 어떤 뿌리 깊은 감정의 맥락이었다.



물론 시공사는 여러 이유로 비판받기도 한다.

책의 선택 기준이나 출판사의 방향성 등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시공디스커버리 총서만큼은

콘텐츠의 완성도가 좋다.

사료를 토대로 써져 있어 정확성이 있고

주제가 흥미로우며 편집이 잘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서점에서는 눈에 띄는 책은 아니다.

화려한 표지가 아닌

투박하고 차분한 도판 이미지라서 그럴까?




그저 짐 틈새에 들어간 책이었지만

미국 생활이 쌓이면서,

그 책은 자주 꺼내 보는 책이 되었다.


공부할 때, 길을 잃었을 때, 외로울 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국어가 보고 싶을 때

얇고 작은 책을 펼쳤다.

그리고 세상이 조금 더 이해되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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