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서운 걸 정말 못 본다.
귀신, 살인마, 스릴러..
그 흔한 호러 영화 예고편도 눈 감고 귀 막고 넘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살인사건’, ‘미제 사건’ 같은 끔찍한 소재를 다룬
범죄 수사물은 정말 좋아한다. 법정물도 좋아하고.
<그것이 알고싶다>, <시그널>, <싸인>, <CSI 시리즈> 시즌 15까지 전부, <Bones>, <Law & Order>, <Mentalist>...
웬만한 수사물은 다 본다.
불 다 끄고 혼자 늦은 밤에도 끄떡없다.
무섭기는커녕, 도리어 집중된다. 왜일까.
사건은 보드, 범인은 정답.
탐정이나 형사가 하나하나 단서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추리를 시작한다.
혹시 저 사람이 범인 아닐까?
이때 나온 복선, 그 장면에서의 말투, 피해자의 말...
조각들을 맞춰가며 ‘게임’이 된다.
그리고 맞혔다! 그 순간의 짜릿함.
공포 영화가 내가 당하는 입장이라면,
수사물은 내가 해결하는 입장이다.
공포보다 통제감, 무력감 대신 집중력.
그 차이가 나를 수사물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
수사물의 구조는 사실 늘 비슷하다.
피해자가 등장하고, 죽거나 사라지고, 수사가 시작된다.
단서가 하나씩 나오고, 수사자는 가설을 세우고,
의심하고, 반전을 겪고서 진실을 밝히고,
범인이 드러난다.
이 전개는 뻔하지만 싫지 않고 오히려 좋다.
사건을 하나씩 풀어가는 그 흐름 자체가 너무 재밌다.
규칙 있는 퍼즐 같지만, 매번 새롭다.
범인이 누굴까.
왜 그랬을까.
어떻게 했을까.
같은 구조 속에서도, 피해자와 범인의 조합,
동기, 트릭은 늘 새롭다.
어떤 날은 피해자가 나와 닮은 듯해 연민이 생기고,
어떤 날은 수사관이 쓰레기 같아서 분노하게 된다.
어떤 사건은 너무 정교해서 혀를 내두르게 만들고,
어떤 사건은 너무 잔인해서 인간 본성을 의심하게 된다.
내면심리를 다루는 고전, 추리력과 논리력 모두 있는 수사물, 너무 좋아한다.
그런데 이렇게 수사물을 좋아하면서도
이상하게 방탈출은 재미가 없다.
둘 다 ‘문제 해결’이라는 점에선 비슷한데도,
도무지 즐겁지가 않다.
왜일까?
수사물은 남이 하는 거고,
방탈출은 내가 해야 하는 거라서 그런 걸까.
수사물에서는 형사나 탐정이 단서를 모으고,
나는 소파에 앉아 그 과정을 따라가며
머릿속으로만 추리한다.
몰입은 하지만, 안전한 거리가 있다.
결정은 그들이 하고, 나는 조용히 상상하며
감정만 쫓는다.
위험도 없고, 부담도 없다. 그게 편안하고 좋다.
반면 방탈출은 내가 해결자다.
직접 단서를 찾고, 제한된 시간 안에 퍼즐을 풀고,
조급해지고, 틀리면 눈치 보이고,
분위기까지 살펴야 한다.
그 순간부터 ‘재미’가 아니라 ‘압박’이 된다.
나는 관찰자일 때 더 흥미를 느끼고,
해결자가 되면 부담을 느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