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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지 않아도 단단히 -플랫 슈즈

by 수수

요즘도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초등학교 첫 학기, 첫날이면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줄을 섰다.

줄을 서면 나는 으레 맨 뒤였다.

알아서 맨 뒤를 가면 그게 내 자리였다.


나는 빨리 자라는 아이였다.

일 년에 10센티, 많게는 15센티씩 자라더니

중학교 1학년 때 이미 172cm였고

성인이 되어서도 키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가장 컸다.


그래서 하이힐은 신어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그 높이가 나를 190에 가까운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큰 게 멋지긴 하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까지 크고 싶진 않았달까 ㅋㅋ

다 큰 어른이 되어도, 신발장에서

하이힐은 내게 없는 물건이었다.


대신 말랑한 플랫 슈즈.

그게 내겐 가장 잘 맞았다.


나는 지금도 패션에 감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큰 키와 큰 발로 살아오다 보니

발이 큰 사람에게 어울리는 신발 스타일에는

나름 감이 생겼다.


나는 보통 265에서 270mm 사이의 신발을 신는다.

처음엔 이 사이즈가 불편하게 느껴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건 그냥 내 몸의 일부이고, 내게 맞는 사이즈니까.


그렇다 보니 더 잘 어울리는 신발,

더 균형 있는 디자인이 보인다.


앞코가 뾰족한 신발은 예쁘지만

신는 순간 발이 더 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에 비해 앞코가 둥글거나 사각형인 디자인은

시선을 부드럽게 정리해 주고,

시각적으로도 발이 훨씬 덜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또 발등을 살짝 덮는 로퍼나 슬립온 같은 디자인은

발의 윤곽을 분산시켜 줘서 훨씬 안정감 있어 보이고

1~2cm 정도의 낮은 굽이 들어가면

플랫이어도 전체적인 비율이 훨씬 자연스럽게 된다.


신발과 바지 색을 맞추거나,

포인트가 발끝보다는 옆선이나 발등에 있는 디자인은

발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개성을 살려준다.

이런 디테일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는 걸 체감했다.




예전엔 그냥 편한 걸 골랐는데

요즘은 “내가 더 잘 어울리는 걸 고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나만의 기준이 생긴다.


이건 내게 잘 맞는 앞코,

이건 발이 더 커 보이게 만드는 모양,

이건 예쁘지만 발이 편안하진 않은 신발.


그런 걸 하나씩 알아가다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플랫 하나 고르면서도

“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옛날엔 그냥 남들이 괜찮다고 하면 따라가고,

내 취향보단 눈치가 먼저였는데

요즘은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아주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지만,

이런 작고 구체적인 선택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힌트 같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말할 수 있게 되니까

예전보다 훨씬 더 편하고,

조금은 더 단단한 느낌이다.


플랫처럼, 낮고 조용하지만 내 기준이 있는 사람.

그게 지금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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