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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하키를 시작한 이유가 뭐냐면

by 수수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취미를 거쳐왔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독서나 전시 보기,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죽공예, 스윙댄스, 종이 공예, 도자기 공예, 카약,

스쿠버 다이빙, 수제 비누 만들기, 클라이밍..

웬만한 취미는 다 한 번씩 발을 담가봤다.


그중에서도 꽤 독특한 취미인 아이스하키

가장 근래까지 열심히 했던 취미인데

사실 그 시작은 2년 전 연애의 이별에서 시작되었다.

“나랑 계속 사귀려면 하루에 한 시간씩 뛰어.”

이 말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전 남자 친구와는 서로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결혼을 전제로 꽤 진지하게 만나던 중이었다.

각자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있던 나날 중

위관장교였던 전 남자 친구가 전역신고를 냈다.


하루는 소방관, 하루는 취업,

하루는 항공 준위를 꿈꾸며 진로를 바꿨고,

일단 먼저 전역 신고를 내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려서 공부를 도우며

같이 고민했었던 시기에 어느 날,


내가 말했다.

“일주일에 단어 10개 외우는 속도면,

목표 점수까지 가려면 현실적으로

꽤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랬더니 돌아온 말:

“너는 운동도 못하잖아.”

“앞으로 나랑 사귀려면, 너도 하루에 한 시간씩 뛰어.”


......?

혹시 기분 상했어? 농담이야? 하는 사이

차였다.


우리는 예식 날짜를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톡으로 이별 통보가 왔고
이유는… 운동을 못해서. 관리를 안해서.


그날의 대화창을 다시 보면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전개다.

덧정 없는데 그 기억은 지금도 난다.




야 그런 돼도 안 한 놈은 사귀지 마라고

친구는 말했지만

나는 그때 왜 말문이 막혔고 왜 한마디도 못했을까?

심지어는 내가 말을 그렇게 해서 자존심을 긁은 걸까

하는 생각 까지 오래 했었다.


스스로 진단하기엔

운동 잘 못하고, 통통하고 큰 체형이

어릴 때부터 가졌던 내 아킬레스건이라

아마 정확히 긁혔던 것 같다.


그 후 어느 날

아이스하키 클래스 광고를 인스타에서 보고

즉흥적으로, 그냥 대뜸 등록해서 바로 갔다.


운동을 하나도 못하는데

운동 중의 상 운동 아이스하키를 선택한 마음의 반은

오기와 반발심이었고, 나머지 반은,

남들이 안 해본 길을 가는 걸

좋아하는 내 성향을 따라 즉흥적으로 간 거다.




서울 도심에 아이스링크장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그 안에서 아이스하키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줄도 몰랐다.


여자도 꽤 많이 하고 무엇보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처음 해보는 스포츠가 예상 밖으로 너무 재밌었다.


눈앞의 퍽, 포지션, 스틱 컨트롤, 주변 시야 등

생각할 게 많다 보니

몸이 힘든지도 모른 채 계속 움직이게 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헬멧 속 머리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부딪히고 미끄러지고 중심 잡느라 정신없는데,

그냥 좋다.

몸을 쓰고 있는데, 운동한다는 생각은 안 들고

그냥 노는 기분이다.

장비를 벗으면 몸이 붕 뜨는 느낌이고,

다리는 개다리춤 추듯 후들거리고,

집에 오면 그대로 뻗는다.


운동치라도 시작할 수 있다.

처음엔 다 못 한다.

넘어지고 헛돌고, 다 똑같이 시작한다.

오히려 그런 같이 못하는 과정에서 오는

유대감도 크다.




물론 몇 번 크게 다치기도 했다.

나는 키가 170 후반 대라,

장비에 스케이트까지 더해지면

웬만한 남자들보다 덩치가 커진다.

그래서 상대가 다칠까 봐,

일부러 내가 먼저 넘어지는 경우도 많다.

넘어질 때도 요령이 필요한데

얼음 홈에 잘못 끼여서 기우뚱하다 넘어져

전치 6주 진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만둘 수 없었다.

내가 해 본 운동 중에서는 매주 그만두지 않고 해온 건

하키가 처음이었다.

빙판 위에서 질주하면 머리까지 식는다.

몸은 땀에 절어도, 기분은 뚜렷하다.

그리고 그걸 하고 있는 내 모습이, 꽤 멋있다.


빙판 위 질주는 다른 운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어느 순간 속도가 붙고 방향 전환이 익숙해지면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어? 싶다.

내 몸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

1년 반 넘게 했던 하키.

한때 누군가가 내게 “운동 못 하잖아”라고 말하며

긁고 지나간 상처를 복원하고,

스스로를 증명해 낸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제 멈춰야 할 때가 왔다.


지금 받고 있는 난자 동결 시술은

시술과 회복을 반복하다 보면,

두 달에 한 달씩은 내 몸이 통째로 흔들린다.

그래서 당분간은 멈추기로 했다. 꽤 많이 아쉽다.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몸으로, 땀으로,

다치면서까지 즐겁게 했으니까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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