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처럼 반짝였던, 비행과 생일의 기억
"구운몽: 잠시 찬란하다 사라지는,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꿈같은 것.”
3월의 첫 비행.
비행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달이자,
나의 생일이 있는 달.
회사는 내 생일 당일과 그 주간에
긴 여정을 선물로 주었다.
이번 생일은 말레이시아에서 맞이하게 될 예정이다.
'두바이-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멜버른(호주)-
쿠알라룸푸르-두바이'
총 1주일의 긴 여정.
떠나기 전, 이상하게 마음이 붕 떠 있었다.
비행에서 맞이하는 첫 생일이라니.
낯선 장소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생일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기대보단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다.
이 여행이 구운몽 같지 않기를, 아니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상반된 마음이 교차했다.
늘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
생일은 대부분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시작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 익숙한 낯섦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타지에서 맞이하는 생일이 혹시 어색한 채로
흘러갈까 봐 조심스러웠다.
혹은, 신입인 내가 선배 크루들과 어울릴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냥 두바이에 남아 친한 친구들과
생일을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 역시 철새처럼 다른 나라로
날아가 있었다.
우리는 생일은 다녀와서 축하하기로 하고,
나는 아쉬움을 접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이륙 점검을 마치고 승객 보딩을 준비하는데, 캡틴의 기내 방송이 들려온다.
"두바이에서 말레이시아까지 비행시간은 약 6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크루 '구름 위 기록자'의
생일입니다. 착륙 후 다 함께 생일 저녁을 먹으러
갑시다. 생일 축하하고,
모두 안전한 비행기 되길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자 크루들이 놀란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넨다.
"어? 너 생일이야? 너무 축하해! 랜딩 하면 꼭 같이
맛있는 거 먹자!"
어안이 벙벙하고 쑥스럽지만 고마운 순간.
생각보다 따뜻한 새 학기의 첫날 같기도 했다.
착륙 후, 우리는 약속대로 저녁을 먹기 위해 외출을
나갔다.
크루들은 내 생일을 핑계로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먹였다.
말레이시아의 밤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뜨겁고 눅눅한 공기, 그 공기 속에 차분히 조명으로
물들어 있는 도시.
야경은 흘러가는 택시 창 너머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생일이니까 이거 먹어봐"
"네 생일에 딱 걸맞은 야경이다!"
"생일이니까 여기도 가보자."
그 순간 나는 이게 단순한 근무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동료의 따뜻한 배려와 마음은 이렇게 낯선 도시조차
포근하게 만들 수 있구나.
아마 다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첫 한 달 차 비행에, 낯선 나라에서 생일을 보내는 신입이 얼마나 외롭고 긴장될지.
그래서 더 열심히 나를 챙겨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적당히 뜨거운 공기 안에서 화려한 금빛 조명의 야경은 마음속에 어른거렸고 찬란했다.
마치 꿈속처럼.
다음 날엔 8시간을 날아 호주 멜버른에 도착했다.
비행 일정상 내 생일은 이미 하루가 지났지만, 축하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착륙 후, 캡틴은 또 말했다.
"오늘 저녁, 호주 와인 다 같이 마십시다!"
우리는 호텔에 라운지에 모여, 비행 이야기,
인생이야기, 루머 이야기까지 나누며 웃었다.
와인의 도수가 아닌, 분위기에 취해갔다.
기분 좋게 웃고 있던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야, 우리 다 같이 수영장 가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좋아! 수영은 저녁 수영이 최고지!" 하면서 크루들은 수영복을 가지러 뿔뿔이 각 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사실 나는 수영복을 챙기지 않았고,
그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나는 그냥 구경만 할게요"라고 하자, 에콰도르 출신의 여자 부사무장이 말했다.
"나 수영복 하나 더 있어. 이거 입으면 되겠다!"
결국 나는 손에 이끌려, 처음 보는 사람의 빨간색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멜버른의 공기 좋던 그날 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별이 쏟아질 듯 빛났다.
물에 둥둥 떠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야, 우리 진짜 가족들 같지 않냐."
정말 가족들 같았다. 처음 일하는 동료들은 비행으로, 기분으로, 마음으로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그날 밤 동료들은 하늘을 다 바라보며 내 생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다음 날, 다시 말레이시아로 향하기 전 멜버른에 사는 친구들과 커피를 마셨다.
친구들은 나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고, 유명한 조각 케이크를 준비해 함께 축하해 주었다.
외로울 줄만 알았던 생일 주간은 그렇게 멜버른의 예쁜 구름과 함께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섹터의 비행, 말레이시아에서
두바이로 돌아오는 길.
다들 "이 비행기 너무 아쉬워"를 반복하며 마치 마지막 여행을 보내듯 단합했다.
우리는 서로의 상담자가 되어주고, 때로는 언니, 때로는 친구, 때로는 가족처럼 마음을 나눴다.
비행에 계셨던 한국인 선배님은 언니처럼 따뜻하게
조언과 챙김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마음 한가득 따뜻함을 품은 채긴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비행이 끝나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길게 포옹하며
인사했다.
"너무 즐거운 레이오버였어. 꼭 다시 만나자!"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나의 첫 생일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크루들. 그 얼굴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로도 나는 매년, 그 한국인 선배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비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짐을 풀기 위해 캐리어를 열었지만, 몸은 집으로 돌아왔어도 마음은 아직도 꿈속에 있었다.
엔진 소리, 콜 벨, 크루들의 웃음
멜버른의 별, 말레이시아의 야경, 생일 노래...
모두 마음속에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눈앞에서는 사라져 있다.
내 방은 유난히 조용하고, 공허하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기쁨과 즐거움의 뒤를 따라 커다란 외로움이 밀려왔다.
"나 왜 울지, 기쁜데 왜 울지? 나 하나도 안 슬펐는데 비행 잘했는데 왜 울지?"
그 질문은 공허한 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이게, 승무원의 삶이구나.
일에서 만난 사람들과 구운몽처럼 짧고 반짝였던 순간들.
그 찰나의 진심이 꿈처럼 사라져 가는 느낌.
이 생일이 정말 구운몽 같았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구운몽처럼 달콤하고 현실처럼 쓸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