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나는 아직 그곳에 있었다.

32년만에 다시 걸은 동네 (행성 -8)

by 이청목

3월의 끝자락이었다.


벚꽃도 피지 않은 초봄이라기엔

기온이 제법 올라가 있었다.


이날은

서울 문래동에 모임이 있었다.


문래동은 내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움직였다.


32년 만이었다.

어떻게 변했을까?


몇 년 전,

네이버 지도로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옛 기억을 더듬으며

구석구석 걸어보기로 했다.


먼저 학교에서

예전에 내가 살던 곳까지 걷기 시작했다.


학교 옆 육교 아래로는

서울 2호선 지하철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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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도

지하철이 '쿠궁쿠궁' 소리를 내며

학교 앞을 지나가곤 했다.


하굣길에는

지하철이 지나가면

괜히 멈춰 서서

지하철이 지나갈 때까지 바라보기도 했다.


한 걸음씩 옮기다 보니

어느새 육교 끝에 다다랐다.

육교가 이렇게 짧았던가.


그 순간

눈물이 올라왔다.


젊었던 엄마와 아빠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을 두 사람의 얼굴이

또렷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살던 집터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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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작은 전자 대리점이었는데

지금은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엄마가 주말에 일을 가면

2천 원을 주셨다.


“1층에서 자장면 사 먹어.”


나는 그 돈으로 자장면을 먹고

남은 돈으로 오락실에 갔다.


그때의 중국집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적어도 40년은 넘은 집이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


집 옆에 있던 도림시장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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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뒤쪽에 있던

생선가게, 건어물 가게,

건과류 가게도 이젠 없었다.


문득

시장 뒤쪽에 있던 치킨집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자주 먹던 곳이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제발 남아 있기를.


시장 끝에서 우측 코너에 있던

치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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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빠가 5천 원을 주면

나는 달려가 프라이드를 주문했다.


닭을 바로 손질해

하얀 반죽을 입혀

기름에 넣던 모습.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침을 삼키던 기억.


“아직 멀었어요?”

“언제 돼요?”


몇 번이나 물어보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시장을 지나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살던 동네였다.

처음엔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다.


멀게만 느껴지던 동네였는데

내 기억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아파트가 들어서고

다세대 주택이 생겼지만,

내 눈에는

지금의 집들 위에 옛날 기억 속 집들이

겹쳐 보였다.


녹슬었던 초록색 대문,

술래잡기를 하던 전봇대,

작은 공터,

사람만 보면 짖으며 쫓아오던 강아지까지


내 눈에 아른거렸다.


골목 어귀에 서니

누나 친구 가족이 살던 집은

아직도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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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겠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그때의 사람들을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동네였다.


그때는 크게 느껴졌던 곳이

이렇게 작은 동네였다니.


베개를 끌어안고 울던 어릴 적 청목이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가던 누나


곤로에 밥을 해주던 엄마

치킨을 같이 먹던 아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미 많이 변해버린 동네인데

이상하게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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