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강제 휴식
새해가 시작되는 겨울
많은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거니는 1월이었다.
엄마가 일하는 곳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계단에서 넘어지셔서
팔을 많이 다치셨어요"
엄마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전화였다.
"지금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큰 병원으로 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24년 1월 엄마는 큰 식당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계셨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시는데
누군가 계단과 복도를
물청소를 해 바닥이 얼어 있었고
평소와 같이 계단을 씩씩하게 올라가던 엄마는
얼어 있던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셨다.
일어나려 해도 팔목이 너무 아프고
다리와 머리까지 아파서
못 일어났다고 하셨다.
엎드려진 채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소리를 질렀지만
돌아온 건
복도 안의 메아리뿐이었다고 한다.
너무 추워서 가만히 있으면
‘이러다 얼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친 오른팔을 구부려 허리에 대고
그나마 괜찮은 왼쪽 팔로
복도를 기어갔다고 한다.
한참을 기어서야 동료를 부르고
사람들은 드디어 엄마를 발견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순간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엄마.
얼마나 무서웠을까.
불러도 아무도 대답 없는 그곳에서
한쪽 팔로 기어가서 사람을 불렀다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도착해서 보니 엄마는 팔목이 부러졌고
뼈가 조각이나 핀을 박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그런 것도 아닌데
나 때문인 것 같아 속상했다.
엄마가 불쌍했다.
그동안 사업이 힘들다는 핑계로
연락을 많이 못했던 것도 미안했다.
엄마는 식당일을 하시기 전에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
“하루 쉬면 얼마가 손해인 줄 알아?”
주야장천 일만 하며 살아온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다.
장사를 하는 동안은 해외여행 한번 못 가고
제주도도 한번 못 가서
비행기도 못 타본 엄마였다.
조금 먹고살 만하니
재개발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옷 가게를 그만두고 식당 일을 한 것이었다.
“나는 쉬면 더 아픈 것 같아”
쉬어본 적도 없으면서,
쉬면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좀 쉬라니까! 안 쉬고 바로 식당일 하더니"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말도 못되게 했었다. 말이라도 착하게 할걸.
엄마는 팔목을 수술하신 뒤 재활까지 해야 하니
정말 강제로 쉬어야 하는 날이 되었었다.
다친 엄마를 보니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엄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일까?
말을 못되게 해서였을까.
그저 엄마가 수술하고 퇴원하는 날까지
자주 오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한테
뭐 하나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깊숙한 곳부터 아팠다.
그리고 이날부터 난 엄마를 대하는 내 마음이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다.
시간을 흘렀고 25년 8월
엄마는 팔목에 있는
핀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셨다.
수술은 잘 된 거 같다.
그래도 엄마는 1월까지 쉬셔야 한다.
오른 손목은 다쳐서 아프고
왼손은 방아쇠 증후군으로 수술을 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양쪽 손이 다 아프다.
그래도 쉬면서 엄마에게는 좋은 일도 있었다.
오랜 세월 일만 하던 엄마가
이제는 쉬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가고 계신다.
매일 산책을 하시고
걷기 운동을 하신다.
올해 4월에는
나와 함께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고,
처음 비행기도 타 보셨다.
이제는 가고 싶은 곳도 많이 생기셨다.
억지로라도 쉼을 가지셨던 게
어머니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된 거 같다.
엄마는 겁이 많다.
주삿바늘만 봐도 겁을 낸다.
8살 된 조카보다도 주사를 더 무서워하신다.
한 번은 주사를 놓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낸 엄마가
아~~ 하며 소리를 냈다.
간호사가 "아직 안 찔렀는데요?”라는 말에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남은 인생에는
주삿바늘이 엄마의 팔에 들어가
엄마가 아픈 일이 없으면 좋겠다.
이제 웃는 날이 더 많은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