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알지?

엄마의 아빠랑 엄마

by 이청목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못해

쌀쌀해지기까지 한 10월 어느 가을 저녁

집안의 공기가 답답해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좋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공원에 누군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집이 9층인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릴 정도였다.


구경 중에 싸움 구경이

가장 재미있다고 했던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창밖을 뚫어져라 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6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부부였다.


“왜 당신 같은 거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사랑하긴 했냐는

푸념인지 사랑싸움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 부부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함께 몇십 년을 사랑하며 살아도

그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것

그게 사랑인가?


순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투박했던 사랑 표현이 생각났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당시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도

60대 초반이셨을 것이다.


아빠·엄마가 맞벌이셔서

방학이 되면

어린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름과 겨울 방학이 되면

충남 태안 외가에서 지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 달 살이!


갯벌 체험, 꽃게잡이, 해루질과


주황색에서 새빨간 하늘로 변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웅장한

노을을 보며 어릴 시절을 살았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은

어린아이의 외로움이 녹아 있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에겐 행복한 추억이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다툼도 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 때문에 다투셨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두 분이 다투실 때면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울먹이셨던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욱하는 성격의 충청도 바다 사나이 할아버지와

교양 있는 듯한 말투와 행동을 하시는

할머니와의 다툼은


어린 내 눈엔 항상 할아버지의

승리 같아 보였다.


그럴 땐 할아버지가 미워서

할머니를 꼭 안아 드렸던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내가 커 갈수록,

외가에 맡겨지기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직접 올라오시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중학교를 올라가는 해에

부천에 신도시가 생겼다.


부모님은 부천의

한양아파트를 분양받았고,

단칸방에 살던 우리는

드디어 '우리 집'이 생겼었다.


축하를 해주시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놀러 오셨었다.


한 손에는 꽃게, 가재,

생선 말린 것을 들고

한 손에는 고춧가루를 들고

두 손이 무겁게 들어오셨던 게 생각난다.


생각해 보면 물건은

거의 할머니가 다 들고 오셨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애교도 많이 없어졌고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때라

하고 싶은 말을 생각 없이 내뱉는 나이였다.


그동안 할아버지한테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할머니한테 좀, 잘해 주세요"


할머니는 따뜻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잘해 준다며

나를 안아 주셨다.


“우리 새끼가 이제 내 걱정을 다 하네”

다 큰 중학생 손주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셨다.


그때였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고백!


“좋아해, 알지?"


할머니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광대가 하늘로 올라가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듯

웃으셨다.


할머니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으이구" 어깨와 몸을 움직이셨다.



충청도 바다 사나이 할아버지의 서툰 사랑 고백과

교양 있는 듯한 말투와 억양인 할머니의 행동이



내 나이 40대 중반인 지금도

그때의 사랑고백이 또렷이 기억난다.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웃으며 잡았던 주름진 손.


바다와 밭을 매러 다니며,

그물에 치여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하고,

검게 그을린 주름진 손이


나이가 들어 치매가 오고,

그제야 일을 그만두시고 나서

손이 하얗게 되었던 그 손이

오늘은 더 그리워진다.


외가를 놀러 가면

할머니는 방에서 항상 말씀하셨었다.

“엄마에게 잘해”


외할아버지와 바다에 함께

나가면 항상 말씀하셨다.

“엄마에게 잘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다른 장소에서

어렸던 나에게 똑같은 당부를 하셨다.


나의 엄마가 나를 사랑하듯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를 많이 사랑하셨다.




밖에 싸우던 분들은 어느새 돌아가고

밖은 조용해져

차가운 바람만이 들어오고 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엄마를 사랑했던 기억과

나를 안아 주셨던 온기가 기억에 남아

마음만은 따뜻하다.


"엄마!

엄마의 엄마랑 아빠가 엄마 걱정을 많이 했네!

앞으론 엄마에게 잘하는 아들이 되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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