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 나뭇가지가 비치는 베란다
어젯밤엔 술을 마시기 위해 아껴뒀던 잔을 꺼내다가 이거 느낌이 이상하다 생각한 지 이 분이 지나지 않아 잔을 깼다. 예감이 있다. 불안은 빗나가지 않는 것이다. 최근 반년 간 나는 새로운 활동을 지나치게 많이 했다. 글을 쓰고, 끊임없이 새로운 취미를 찾고, 영어 학원을 다니고, 차를 사고, 집안을 꾸미고… 무언가에게서 나의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나의 질병과 연관시켜야 할지, 혹은 좀 불편한 개성 정도로 여겨야 할지 고민해 왔다. 지금의 나는 질병의 판정승으로 중간 결론을 내렸다. 물론 또 다른 반년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판단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질병이 있다. 그 질병은 고장 난 나침반처럼 관심사를 이 방향 저 방향 가리키며 휘젓고, 나는 그것에 무력하다. 따지자면 약자다. 내 안에 나를 괴롭히려는 (그런 의도를 갖지 않아도) 존재와 그것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는, 마치 옛날의 일진 아래서 고통받던 빵셔틀 같은 존재가 있다. 글을 쓰는 나는 빵셔틀에 가깝다. 설국열차로 치자면 꼬리칸이다. 머리칸이 휘젓는 방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더 나쁘다. 가끔 꼬리칸인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동조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새로운 성지인가 보다 하고.
결국에는 직장을 나오게 될 것 같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내 잘못이다. 전공도, 직장도 선택하게 되었을 때 조금 더 생각이란 걸 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질병의 발병까지 예상한단 말인가? 남들은 잘만 견디는 걸 나 혼자 낙오될 것이라고 예측을 했어야 했을까? 그게 가능했을까? 이것 또한 나선의 경로이다. 나는 또다시 안정되고 소위 부러움을 사는 자리를 박차고 불안정하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곳으로 나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가는 발걸음이 조금이나마 우아할 수 있도록 발버둥을 치는 것뿐이다.
집을 새로 구해야 했다. 내가 기존에 받던 봉급의 1/5 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새 직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에서는 내가 지금 내는 주택 담보 대출을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부모님과 집을 합치기로 했다. 어릴 적 놀러 가던 지역이다. 회사를 떠나는 게 마음 아파서, 그리고 정을 준 집을 떠나기가 싫어서 많이 울었지만 그래도 새 집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베란다 발치로 백일홍 꽃이 비쳤다. 건물 사잇길은 밤에 걸으면 제법 우아한 운치가 난다. 내려앉은 천장까지 수리해야 하는 골치 아픈 집이지만 수리를 하고 나면 꽤 만족스러운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제 나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러 간다. 주변의 모두가 놀랐다. 나를 만류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전적으로 옳음을 안다. 나는 변명을 댄다. 이것은 질병의 선택이라고. 세상에는 나 같은 바보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