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주고 온 것들
우리 회사는 보안이 엄격한 편이고, 클라우드가 아니면 업무를 진행할 수도 없다. 로컬 컴퓨터에는 깔린 프로그램도 거의 없다. 회사에서 기본으로 설치한 앱이거나, 혹은 캐드 같이 예외적으로 가끔 허가해 주는 앱이 아닌 경우 설치 및 유지가 불가능하다. 정확히는 설치는 되는데, 보안팀에서 지우라고 연락이 온다. 깔아봤었다.
보안이 엄격한 회사를 다니고 떠난다는 것의 의미를 이틀 전 금요일에 짐을 정리하면서야 알았다. 바로 남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내 첫 회사는 필름을 만들었는데, 거기 전문가분은 필름을 자기 파일에 내역과 함께 빼곡히 붙여 놨었다.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뭐… 샘플을 들고 나올까? 국정원이 찾아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사실은 X-Ray에서 이미 잡힌다.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물건들을 추려 봤더니, 텀블러. 내가 가져다 놓은 차 제품들. 비타민 영양제. 내가 가져다 놨었던 옷. 명함. 해지한 법인카드 실물. 명패. 이게 전부다. 이것 외에는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그러나 약간의 위안이랄까… 이게 위안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1년을 일했어도, 10년을 일했어도, 20년을 일했어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을 거라는 점이다. 공평하다고 생각하면 간사하게도 약간 나아지는 게 있다. ‘쟤도 불행하잖아 그러니 괜찮아’
그렇지만 내 서랍엔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다. 그것은 보안 X-Ray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혹은 챙길 가치가 없다. 그런 것들은 아끼는 사람들 책상에 나눠서 주고 왔다.
우선 이동식 소형 현미경 카메라. 이건 사무실과 실험실, 그리고 양산 현장을 다니며 샘플의 외관을 촬영하기 좋다. 육안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잘 보인다. 내가 가지고 있던 현미경의 특별한 점은 거의 10년쯤 된 제품이어서 사용은 가능한데 회사의 자산으로 등록되어 있지가 않았다. 즉, 사용자는 자산관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무려, X-Ray에 안 잡힌다! 가지고 나갈 때마다 자산 반출을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 아는 분은 아실 거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솔직히 그래서 내가 가질까… 했는데. 뭣에 쓴다고 저런 걸.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책상에 놓아줬다.
두 번째로는 불이 들어오는 루뻬였다. 사실 이건 대단한 건 아닌데… 이거 필요한 사람? 물어보자마자 가장 친한 후배가 ‘저요!!’ 했다. 이동식 현미경을 받지 못해서 서운했나… 하지만 이 루뻬도 좋은 거니깐. 즐겁게 주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이것도 매우 잘 보인다.
그 외에는 테플론 소재의 비커도 있었는데, 이건 불산이 함유되어 있는 시약을 소분할 때 (생각해 보면 그딴 일을 했단말이지 나는) 좋다. 비슷한 류로 PP로 된 비커들도 있는데 이건 비싼 테플론 소재였다! 내 기억으로 가장 큰 사이즈의 비커가 7년 전에 17만 원이었던가 27만 원이었던가… 하여튼. 이걸 받은 사람에게는 100만 원짜리 값비싼 서모커플 뭉치도 주고 왔다. 2000K 정도까지 측정이 가능한 좋은 서모커플이다. 요즘 회사 어려운데, 앞으로는 안 사줄지도 모르니까.
남은 건 전공책, 다양한 사이즈의 자, 히오끼 같은 것들이었다. 다 줘버렸다. 이제 서랍은 텅텅 비었다. 남은 건 노트북의 반납과 내 마음의 정리 정도일 것이다. 이제 며칠이면 백수다. 여전히 직장인일 사람들에게 카톡이나 날려서 팔자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이게 팔자다’
아,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선물을 받았다. 바보 같고 너무 웃긴 일화였다. 나와 같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동료가 대학원 시절에 (6~7년 전으로 예상한다) 백화점을 갔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자기 코 앞에 드론이 날아와 대령된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단다. 당시 20만 원쯤 했던 그 제품을 이 사람은 냉큼 사 와서 학교에서 돌렸다. 교수님 염탐하려고. 교수님이 당시 6층에 사무실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걸 건물 바깥에서 관측해서 퇴근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포부를 품었었단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건물과 주변은 빌딩풍이 굉장히 강하게 부는 곳이다. 드론은 훨훨 날아가버렸다. 그렇게 동료가 20만 원을 버린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 현실판 빅뱅이론과 함께 일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