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전부이거나

ㅡ 영화 속 그 한 줄 <킹덤 오브 헤븐 >

by 사피엔




<킹덤 오브 헤븐>을 다시 보다



만약 3차 대전이 발발한다면 가능성 높은 유력한 지역이 어딜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가 성지라 부르는 곳, 나는 예루살렘을 떠올린다.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도 "평화와 구원의 땅"이라 불리는 이곳이, 종교와 무관한 제삼자의 눈에는 그저 인간의 이기와 탐욕에 둘러싸인 잠시도 평화롭지 못한 폭력의 땅으로 여겨지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내가 무지하거나.)



2005년 상영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바로 그 예루살렘을 두고 벌어진 전쟁을 다룬다. 십자군과 이슬람군, 피로 물든 성지, 거대한 성채 안에서 터지는 인간의 이해관계. 개봉 당시 퍽 인상 깊게 봤던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예루살렘 성지 수호" 혹은 "해방"이란 기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물든 하틴전투에서 주인공 발리안과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고 나눈 대화.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지. 모든 것이기도 하고."



십자군 전쟁에 얽힌 인간들의 탐욕스러운 이해관계나 목적을 단 몇 마디로 압축해 잘 표현했다고 경탄하며 이 감동스러운 문장을 어디다 써먹어 볼까 욕심내던 난 고작, 카톡 프사 상태메시지 창에 이 심오한 문구를 몇 번 올리다가 말았다. 모든 인간군상과 삶의 작태를 대변하기도 하는 이 멋들어진 글귀를 제대로 알아보는 눈이 많은 것 같지 않아서...





리암 니슨, 제레미 아이언스의 분위기와 스케일 남다른 전쟁신이 압도적이었던 <킹덤 오브 헤븐>. 사실 이 영화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있는 더 큰 이유는 젊은 발리안 보다 멋있고 섹시해 보였던 이슬람 군주 '살라딘'때문이다. 무슬림들의 영웅이었던 역사적 인물 살라딘의 모습을 영화에서는 비중 있게 다루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11세기 후반 이슬람권 셀주크 튀르크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하자, 로마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전쟁을 촉구한다. 그러자 너도나도 십자군에 참여하겠다는 열풍이 서유럽 전체를 휩쓸었는데 당시 십자군 운동의 진짜 속내란 것이 각 계층의 정치 경제적 이익 추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교황과 교회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군주들의 영지를 맡아 재산을 증식할 속셈으로,

군주와 기사는 새로운 영지와 전리품을 차지할 욕심에,

상인은 무역로와 막대한 부를 꿈꾸며,

하층민은 천국행 입장권을 담보로.



1096년 첫 번째 십자군(연합군)이 결성되고 3년 만에 예루살렘을 비롯한 동지중해 일대를 정복한 십자군은 그곳에 4개의 그리스도교 왕국을 건설하고 무장하지 않은 이슬람 상인들과 죄 없는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강탈과 살인을 서슴없이 행하며 벼르고 벼른 각자의 이득을 챙긴다. 드디어 지상낙원이 펼쳐진 것이다.






이에 분노한 살라딘이 이슬람 전역에서 강력한 군사를 모집해 진군하자, 예루살렘 역시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을 꾸려 대적하지만 살라딘의 공격에 무참히 깨지며 모든 것을 잃는 대참사를 겪는다.



서구적, 기독교적 세계관에 길들여진 시각으로만 보면 의구심이 든다. 영화에서 잠깐 보여준 살라딘의 면모는, 종교의 탈을 쓴 무자비한 집단인 그리스도교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러 온 진정한 구원자로 비치니 말이다.. 실제로 살라딘은 기독교조차 존경했던 인물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추앙받고 있다. 영화는 발리안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내주는 대가로 모든 백성을 무사히 살려내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만 세계사 책들엔 이후 살라딘의 높은 덕망과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실려있다.



제3차 십자군 전쟁 중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역사적 대결, 전쟁 속 우정, 기사도에 관한 이야기들은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퇴근 후 역사 공부 삼아 다시 봐도 좋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






서로의 성지가 죽음과 전쟁의 원인이 되므로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덧없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고 성채를 지켜내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자에겐 또 모든 것이기도 한 아이러니.



결국, 누군가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돌덩어리, 또 누군가에겐 "모든 것"이 걸린 싸움, 그러니까 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굴러간다. 이득과 명분, 욕망과 신념이 뒤엉킨 채 아무것도 아니거나, 혹은 전부이거나, 또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이 모순투성이의 삶은.



아! 높은 암벽 낭떠러지 위에서 성벽을 쌓느라 피땀 흘린 그 누군가에겐 그저 민생고였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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