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방정식
엄마는 자주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항상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남자만 해도 세 명.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삼촌'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듯 외부로 향했고, 그 남자들은 늘 '삼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린 우리는 시키는 대로 삼촌이라 불렀고, 거부감 없이 함께 밥을 먹었다.
그 남자들이 싫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더 싫었으니까. 더 무서웠으니까.
어린 시절, 나는 그들의 존재를 그저 받아들였다.
마치 우리 집 가구처럼, 그저 있는 것들로.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달라졌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눈이 밝아지면서 '삼촌'들의 정체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추악한 민낯을 보는 내가 더 낯 뜨겁고, 더 불편했다.
그들의 존재는 내 가족의 부끄러운 비밀이었고, 나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공범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과거를 끄집어내며 항상 부부싸움의 불씨를 피웠다.
"네가 처음부터 이랬다"는 말은 그의 단골 문장이었다.
마치 과거의 실수 하나가 현재의 모든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듯이.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순간은 언제나 나에게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그 곁의 인간들을 더 싫어하게 됐다.
아버지는 엄마의 부적절한 행동을 들춰내며 싸움 도중 꼭 이렇게 말했다.
"너희만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했다."
자신이 피해자라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때리고 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비겁한 궤변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일쑤였다.
정말 황당하지 않은가?
아버지는 늘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엄마가 바람을 피웠으니까 내가 때리고 욕한 건 당연하지 않냐"고.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게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진짜, 자신에게는 통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순간마다 나는 속이 뒤집혔고, 무기력했고,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정작 그들만 몰랐다.
엄마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자신은 엄마를 때려도 되는 자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분노를 휘두르기 위한 비겁한 궤변 뒤에 숨었다.
자신이 가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죄책감 없이 폭력을 계속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붙들 수 있었을 테니까.
그의 자존심은 그런 거짓말로만 지탱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깊은 곳에서 진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저 폭력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부모는 우리의 허락도 없이 자신들의 불구덩이 속에 우리를 넣었다 뺐다 하기를 반복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미 그들은 부모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세계 안에서 점점 증오라는 감정으로 물들어갔다.
아버지는 이혼하고 아들 하나 딸린 주제에 처녀에게 장가든 남자였다.
그런 주제에 고마운 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엄마를 때리고 무시했다.
어느 여자가 그런 남자 옆에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밖으로 돌며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는 엄마는 또 뭐란 말인가?
한 번 때린 사람은 그 버릇 평생 못 고친다.
그런 사람 곁을 떠났어야 했다.
맞고 사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도망치든, 신고하든, 벗어났어야 했다.
그 시절,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 패야 한다"라는 쓰레기 같은 말이 있었다.
이 집, 저 집, 여자는 다 맞고 산다며 엄마는 그 헛소리에 무너져 살았다.
일그러진 사회가 만들어낸 거짓말이 한 여성의, 아니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짓밟았다.
자식들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도대체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그들은 마치 동물처럼 자신들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이란 걸 흉내 냈을 뿐이다.
아무리 힘든 시대를 살았다 해도, 모든 부모가 그들 같지는 않다.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그들에게는 없었다.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로 성인이 되고, 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한다.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은 성인들이 부모 자격이 있나 싶을 만큼, 부족한 둘이 만나 생명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셋이나. 이건 아이러니이자, 기적이다.
자신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가진 건강한 새 생명 탄생 앞에서 그들은 감사는커녕, 서로에 대한 원망으로 아이들을 키워갔다.
아이들은 그들의 전쟁에서 볼모이자, 방패였다.
때로는 무기였고, 때로는 구경꾼이었다.
그들로 인해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별 볼일 없는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가 만나 결국 별 볼일 있는 인간들이 되었다.
부모가 되어 서로를 빛나게 해주었고, 서로를 살아갈 이유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그들은, 서로에게 이유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런 지극히 평범한 논리도 그들은 모르고 산다.
서로를 아끼지도, 존중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그렇게 부모가 되었고, 그저 그렇게 조부모가 되었다.
때리는 인간이나, 바람피우는 인간이나 이제 와서 보면, 도긴개긴이다.
악순환을 반복하면서도 그들은 끝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씁쓸하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 그들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고통만이 유일한 언어였던 그들은 그 길이 어디로 향하든 멈추지 않았다.
불행한 삶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고 있었다.
그들이 정말 몰랐을까? '부모'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를?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가족'이라는 단어가 따뜻하다는 걸 느낄 수 없었다.
가족은 늘 두렵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만 한 이름이었다.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명. 그 생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존재였다."
이제 나는 안다.
부모가 되는 데 자격시험은 없다.
누구나 생물학적으로 부모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부모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선택이고, 노력이고, 매일의 결정이다.
내 부모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그런 선택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와 분노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고, 그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를 낳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숨 쉬고,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명"이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빛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완벽한 교과서였다.
그리고 그 교과서를 통해, 나는 나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생명.
그 생명은 이제,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조금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