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퇴사는 해피엔딩
병가 후 모두가 예상했던 수순으로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내 병의 근원 1은 퇴사 선언 이후로 나에게 별 관심을 갖지 않았고, 2는 인수인계 할만한 것들을 정리해 달라고 했다. 퇴사 날짜가 정확히 잡히고 나서 나는 틈틈이 인수인계 문서를 만들었다. 어떤 업무들을 해왔고, 정기적으로 어떤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지, 주로 문의가 들어오는 업무가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은 어떻게 대처하거나 대답해 주면 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썼다. 관련된 협력업체 담당자들 연락처들도 전부 정리해 뒀고, 협력업체 담당자들에게도 나의 퇴사를 메일로 알렸다.
정리하고 보니 생각보다 내가 맡아왔던 업무들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남은 사람들 걱정에, 이 업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좀 여러 사람들의 힘을 덜어줄 수 있는 업무들은 짬날 때마다 개선 및 수정을 해서 요청자와 새 담당자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처리도 해놨다. 그게 내가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고 생각한다.
내 고충을 알고 있던 다른 부서의 부서장님은 나를 따로 불러 수기님이 겪으신 그간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고, 도와줄 수 없어 내심 미안했으며 그동안 수고 많았다는 위로의 인사를 해줬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케어해야 했던 내 윗사람들은 내게 빈말로라도 수고했단 말을 해주지 않더라. 뭐, 기대한 말은 아니었다. 함께 일했던 분들의 아쉬움 섞인 메시지들을 감사히 받고, 사무실에 계신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뵈어 그동안 배려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인사를 한 후 재직한 기간 동안 쌓였던 뚱뚱한 짐을 짊어지고 나는 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약에 취해 하루 종일 잠만 잤고, 어느 날은 이유 없는 눈물이 쏟아져 펑펑 울었으며, 어떤 날은 폭식도 하고, 고통으로 퇴사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슬픈 요양을 즐겼다. 도파민을 활자에서 찾아 하루 종일 책만 읽기도 하고,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보며 엉엉 울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와인과 소주와 맥주를 잔뜩 사와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창밖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밤새 쳐다보기도 했다.
참으로 이상한 감정이었다. 나도 내 일에 대한 책임감과 열정이 있었고, 동료애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왜 함께 일한 동료들은 나와 함께 일할 수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퇴사를 말리는데, 윗분들은 아무도 내 퇴사를 말리지 않았던 걸까. 내가 그렇게 불필요한 부하직원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거쳐온 대부분의 회사는 yes를 좋아했다. 나는 내가 납득하지 못하면 yes를 말하기까지 꽤 오랜 기간을 윗분들과 감정소모를 해야 했으니 나같이 yes가 바로 나오지 않는 부하직원보단 빠릿빠릿하게 '완전 yes!'를 외치는 직원이 더 좋았을 것이다.
내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내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의 말이 아닌 나 자신이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글의 제목처럼 분명 내 잘못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잘못도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내 잘못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건지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왜 나만 죄송해야 하는지 답답했다. 이런 문제에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 알았어. 미안!"하고 생각이 멈춘다는데 나는 그게 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본가에 갈 때나 정기적으로 병원을 갈 때 빼고는 내 집 안에 나를 가둬두고 살았다.
엄마는 내 신체화 증상이 좀 나아질 때까진 간단한 동네 산책으로도 걱정을 했다. 그것도 미안했다. 내가 엄마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약물치료 덕에 어느 정도 몸에 힘이 생긴 후엔 동네 산책을 해보라고 했지만 그걸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무기력에 또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은 내가 집 앞 편의점에 다녀왔다는 말만 해도 정말 잘했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더 나아가서 집 앞 카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책을 읽어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지만 그것까진 무리였다. 감정 소모가 크게 느껴졌다.
무기력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