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꼬였을 수도, 그렇다면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중적으로 약물치료를 시작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꽤 많은 조언들을 들었다. 나에게는 내 병이 숨겨야 할 비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숨기지 않고 약물치료를 시작했음을 알렸다.
그렇게 대놓고 내 병에 대해 오픈을 한 후 대부분의 지인들은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참 많이 해줬다. 아마 그들도 난감했을 거다. 멀쩡하게 수다 떨고 놀았던 지인이 '사실 내가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져버렸으니.
후련하기도 했고 좋은 말도 참 많이 들었다. 그리고 같은 증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고백한 지인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공감하고 서로를 응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상태에 대한 말을 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말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다.
조회 통계를 확인하지 않아 이 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는지 잘 모르긴 하지만 이런 일련의 경험들이 병이라는 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글을 읽고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힘을 내라는 위로는 사실 위로가 아니다. 도저히 아무리 용을 써도 힘이 나지 않아서 이런 상태가 됐는데 어디서 힘을 끌어내야 하는 걸까. 또한 그럴 때일수록 더 힘을 내야지,라는 말도 위로가 아니라고 느껴진다. '그럴 때'는 대체 어떤 때를 말하는 건가? 이렇게 신체화 증상까지 와서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바로 그때를 의미하는 걸까.
물론 이런 말들은 많이 듣기도 했고, 그렇게 언짢거나 마음이 상하는 말처럼 느끼진 않았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본인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담아 응원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기 때문에 어떻게든 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살짝 고백하자면 나는 엄마와 참 친하다. (엄마도 인정했다. 우리의 친함을.) 엄마의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서로의 비밀 얘기도 참 많이 한다. 그래서 그런가 엄마의 큰언니인 큰 이모와도 참 각별하게 지낸다. 내 자식들보다 조카인 수기 네가 더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이모가 나에겐 있다. 이모는 자신의 동생인 엄마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나에게 참 많이 얘기해 줬다. (물론 엄마에겐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다.)
이모는 정말 지쳐 보였다. 운전을 하는 내내 '힘내야지. 힘을 내야지.'라는 말을 반복하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나는 내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이모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얘기했다.
"이모, 힘이 든데 왜 힘을 내려고 해? 이모는 지금 이모에게 들이닥친 이 일들로 인해 마음이 지쳤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데 왜 억지로 힘을 내? 힘들면 그냥 '아, 나 지금 힘들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억지로 힘내려고 하지 마. 그냥 힘든 채로 잠깐은 그렇게 있어도 괜찮아.
눈물이 나서 울고 싶으면 차라리 펑펑 울어. 대신 옆에 미지근한 물 한 컵 두고 물 한잔씩 마시면서 울어. 눈은 비비면 부으니까 흐르는 눈물만 살짝 닦아. 쓸 힘이 없는데 힘내야지 생각하지 마.
이모는 지금 이모가 왜 힘이 들고 마음이 지치는지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잖아. 그 이유가 해결되면 이모가 느끼는 이 마음들이 아주 많이 사라질 거라는 것을 알잖아. 그리고 그마저도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중이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이유 없이 우울하고 기운이 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 아닐까?"
내 말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운전만 하던 이모는 "그러네. 힘이 없는데 힘을 내려고 했네. 수기가 이렇게 예쁘게 잘 커서 이모 마음 챙겨줄 줄도 알고, 고맙네." 그렇게 대답했다. 이모에게 해준 말들은 사실 내가 누군가에게는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문득 생각했다.
반대로 제일 최악의 위로(?)는 대체로 이런 말이다.
다들 힘들어, 세상에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다 그렇게 살아.
지금 당장 일어나서 햇빛을 쬐고 와.
약을 그렇게 많이 먹어? 그 의사 믿을 수 있는 의사 맞아?
이런 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훈계를 할 거면 훈계만 하고, 위로를 해 주고 싶은데 할 말이 이런 말밖에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입을 다물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미 상대방은 당신의 표정으로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예전처럼 우울과 공황장애가 드러내기 부끄럽고, 한심한 인간이라는 평가가 깔리는 시대는 지났다.
마음이 고되어서, 짜내어 쓸 에너지조차 방전되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냥 덤덤하게 '그랬구나.'라는 상대방의 한 마디가 더 큰 위로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내가 정말 썩은 마음속으로 잠식되었을 때는 약간 관종의 무드가 생겨서 '나를 좀 더 챙겨주고 배려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다.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을 꼬아서 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지금은 그런 시기가 잘 지나갔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일 테다.
물론 내 생각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생각이 맞다. 같은 우울증이어도 증상이 다르고, 상대방의 말에 느끼는 생각이 다른데 내 말이 무조건 맞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에서 이 정도의 존중까지 없으면 어떡하겠어.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런 말은 하지 말자.
그래서 그랬었구나.
혹시 나랑 대화하다가 증상이 생겼던 때도 있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