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에 관하여

제발 잠 좀 자게 해 주실 수

by 수기

나는 꽤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앓았다. 흐릿한 기억 속 사춘기 소녀는 매일 밤 얕은 잠에 뒤척였고, 때로는 얼핏 지나가는 쿵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겨우 잠들어도 침대 밖으로 팔다리가 삐져나가는 감각에 눈을 번쩍 뜨곤 했더랬다. 벽에 달라붙어 자는 습관은 불면증으로 인해 생겼다.

그 소녀는 무럭무럭 적당히 자라 이렇게 아직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어른이 됐다.

언젠가 친할머니와 한 방에서 잠을 잤는데, 할머니가 엄마에게 그러셨단다. 수기는 왜 이렇게 몸부림을 치며 잠을 자냐고. 잠을 자면서도 내가 뒤척이는 것을 인지하면서 잠을 자는 게 일상이 됐다.


내 불면증의 원인은 무척 다양해서 단순히 예민한 아빠를 닮았다고 퉁을 치곤 했지만 우리 아빠는 대체로 안방에 들어간 직후부터 코 고는 소리로 숙면을 표시한다.

사실 어린 시절은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생각났다.

부모님이 온갖 수면 유도 영양제를 열심히 사주셨었다는 것을. 삼키는 것조차 고통인 고약한 냄새의 환도 먹어봤고... 맛있는 영양제도 먹어봤다. 소용도 없고 끈기도 없어서 방 정리를 할 때마다 유통기한이 오지게도 지난 (비싼) 수면 영양제가 한 무더기씩 나왔던 다소 지저분한(?) 기억들도.

성인이 된 후에는 잠들기 전 와인 한 잔이 숙면에 도움이 된다며 아빠가 와인도 사 왔다. 그냥 와인을 마시고 잘 못 자는 성인이 됐다.


본격적으로 약물 치료를 시작한 후에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마다 상상했다. 반 정도의 물이 들은 유리병을 바닥에 가로로 눕히면 순식간에 유리병의 주둥이를 막아버리는 물들을. 그래서 내 몸도 유리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생각이 잠들기 위해 누우면 옆으로 흘러 흘러 머리로 쏟아지듯 차오르는 것일까.

의사 선생님은 다양한 수면제를 함께 처방해 주셨다. 매번 하루이틀만 꿀잠을 자고 그다음 날부터는 귀신같이 내성이 생겼다. 의사 선생님은 어느 순간부터 내 처방약에서 수면제를 빼버리셨다.


정말 피곤하면 정말 피곤해서 잠들지 못하고, 과음을 하면 숙취가 사라질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날밤을 새서 그다음 밤에 자야지 계획하면 날밤을 새고 돌아오는 밤에도 잠들지 못했다. 잠들어도 매일같이 여러 개의 꿈을 꾸고 피곤하게 깼으며, 꿈 한 번 꾸지 않고 잘 잔 날은 연중행사가 되었다.

그래도 최근 몇 달은 꽤 금방 잠들었기에 이제 잠드는 시간은 짧아졌다고 좋아해도 수면의 질은 언제나 좋지 못했다. 금방 잠드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는데, 요 근래 두어 달은 내게서 잠드는 시간마저 뺏어가 버렸다. 사람은 자고로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을, 나는 감사가 부족한 인간이었다. 금방 잠드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겼어야 했다.


다행인 건 예전처럼 불안이 가득 차 잠들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 예전엔 잠이 와서 누우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너 잠들면 안 돼' 하고 협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다. 그런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부정적인 생각들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나는 매일 밤 유튜브를 틀었다. 불심으로 이겨내 보고자 불경도 틀어보고, 우주과학 다큐도 틀어봤고, 삼국지 이야기도 틀어봤고, 심지어 최면영상도 틀어봤는데 복불복이더라.


근데 이상한 건 본가만 내려가면 몹시 잘 잔다. 머리만 대면 드렁슨 드렁슨 잘만 잤다. 낮잠을 푸짐하게 자도 밤만 되면 드렁슨 드렁슨 잘만 자는 것이다. 가족들이랑 다 같이 살 땐 그렇게 잠이 안 오더니. 엄마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최근 본가에서 일주일 넘게 있었는데 매일 강아지랑 같이 낮잠을 퍼질러 자고 열한 시에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잤다. 그리고 내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잠이 달아났다. 혹시 나는 잠을 본가 안방 금고에 두고 오는 걸까? 엄마는 나한테 금고 비밀번호도 안 가르쳐줬는데...(시무룩)


사실 이 글도 잠이 안 와서 멜라토닌 한 알을 때려먹은 후 쓰고 있다.

머리만 대면 잘 자는 사람들이 부러워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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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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