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과한 우울이 머쓱했다.

쉬어가는 이야기

by 수기

사실 브런치북을 만들고 나서 내가 아프기 시작한 후의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듯 쓸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들을 기억해 내기 위해 친구들에게 털어놨던 카톡 대화를 찾아 '그때 내가 그랬구나.' 뒤늦게 떠올리는 경우도 있고, 너무 시간 순서대로만 쓰는 것도 어쩌면 읽는 재미를 떨어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쓰는 재미도 없었다.


지난 일요일에 바로 올리려고 써놨던 글의 임시 저장본을 읽다가 '정말 우울 투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함을 살짝 덧대서 '세상에 우울한 사람은 많지만 그래도 영 못 살 세상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과거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빼곡하게 무기력했다.

그래서 그냥 이번 주까지만 쉬어갈까, 하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과의 약속이기 전에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기에 좀 덜 무겁고 짧은 글로 쉬어가는 글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열심히 가독성 있게 고쳐봐야지, 하는 강박이 덜 느껴지도록.


약물치료를 시작하며 나는 다양한 조합으로 약을 먹었다. 어떤 조합은 과하게 몸이 늘어지고, 어떤 조합은 과하게 텐션이 올라갔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아무리 약의 용량을 높여달라 부탁을 해도 어지간하면 낮은 용량에서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에 집중하셨다.

흡사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불안은 어느 정도 잡혔으나 문제는 우울증이었다.


대부분의 우울증 약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특정 성분으로 인해 내 신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처음엔 그게 부작용인줄도 몰랐다.

그냥 좀 불편한 채로 살다가 상담날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가 모르겠는데요. 일단 확신이 없어서 뭐라도 말씀드려 볼게요.' 라며 나는 내가 그동안 느꼈던 신체적 불편함에 대해 토로했다.

알고 보니 부작용이었다. 대부분의 우울증 약에는 해당 성분이 들어가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런 부작용을 느끼는 경우는 극소수라고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선택받은 자가 되었다. 아닌가, 선택할 수 없는 자가 된 건가.

가뜩이나 약 조합을 열심히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우울증 약의 종류가 확 줄어든 것은 의사 선생님에게도 꽤나 피곤한 일이셨을 것이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우울증 약을 넣어 2주 단위로 상태를 관찰하셨다.


하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우울했고, 우울한 이유를 모르겠으며, 웃으라고 만든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보며 펑펑 울었다. 그냥 드라마를 보며,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읽으며 목놓아 울었다.

진짜 심할 땐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지금 보고 있는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에서 ost를 부른 것이 영상과 함께 나오면 그게 너무 감동적이어서 울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ost를 부른 게 이다지도 감동적일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우울이 심할 땐 그냥 날아다니는 낙엽만 봐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으니.

분명 열 번도 더 본 드라마기 때문에 바로 다음 회차에서 두 주인공은 재회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데, 둘이 헤어져야만 하는 장면이 나오면 저항 없이 목놓아 울었다.

'왜! 왜! 헤어지냐고! 개오바야! 어어어어어어엉!'

하고 울다가, 문득 핸드폰 액정에 비친 내 몰골이 거지 같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를 보면 여자주인공이 흐어어어엉! 하고 울 때 청순하고 뽀얗고 적당히 붉은 홍조로 울던데 꺼진 핸드폰 액정 속에 비친 오열 중인 내 모습은 꼬질꼬질했다. 야무지게 틀어 올린 똥머리, 눈물이 왈칵 뿜어져 안경알에 튄 미세한 눈물방울들, 퉁퉁 부어 새빨개진 얼굴과 목이 잔뜩 쉬어 헐떡임에서 쇳소리마저 느껴지는 숨소리.

조금 머쓱했다.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오열하는 내 모습에 취해보는 경험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했다.

한참을 오열하다가 머쓱해진 나는 뚜벅뚜벅 화장실로 걸어갔다. 찬물을 세게 틀어 얼굴의 열을 식히고 부기를 빼고 헐떡이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거울을 봤다. 어우, 인상이 찌푸려졌다. 찌그러진 찰흙 같았다.


그렇게 깨달았다.

가끔은 내 감당 못할 우울이 머쓱할 때가 있다는 걸.

그게 느껴질 때면 아주 조금은 웃음이 났다.

어차피 완전히 나을 수 없다면 그냥 이렇게 '가끔은 우울하고, 가끔은 그 우울을 이기지 못해 울며, 가끔은 그 눈물에 머쓱해 히죽 웃는 삶'을 반복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나는 딱 그만큼만, 딱 적당히 심한 정도까지만 우울했으므로.

의사 선생님께도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선생님, 저는 울려고 우울한 건지 우울해서 우는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그냥 툭하면 울어요. 미치겠어요."

뭐, 결론은 우울증 때문이었지만.


그렇게 병원에 내원해 의사 선생님께 굉장히 유명한 드라마 제목을 얘기하며 그 드라마가 그렇게 슬픈 드라마였냐고 묻자 잠시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던 의사 선생님은 새로운 약에 도전해 보자고 하셨다.(ㅋㅋㅋㅋ) 그렇게 나에게 맞는 우울증 약을 찾았다. 부작용도 거의 없고 사람을 멍하게 하는 것도 없고. 완벽하진 않아도 적당히 괜찮은 약이었다.

이제는 그 시절 봤던 드라마를 봐도 별로 울지는 않는다.


안 운다고는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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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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