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통이 밀려와

어흑 가난해

by 수기

마지막 회사 이후 회복기를 빙자한 백수생활을 영위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나는 비교적 많이 건강해졌으나 내 통장은 점점 아파지기 시작했다.

사실 올해 상반기까지는 견딜 정도의 돈은 통장에 있었다. 계획에 없었던 신차 구매로 인해 늦봄까지 매달 자동차 할부금이 나간다는 사실이 내 가난을 앞당겼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지점에서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중고차가 아니고 신차? 백수인데 큰돈이 들어가는 차량 구매? 당연히 궁금할 수 있다.

지금이 아니면 원활한 운전 능력 향상에 기여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는 판단이 있었고, 한동안 중고차를 알아보러 다니던 아빠가 가까운 지인에게도 중고차 사기를 당할 뻔 한 사건이 있었으며, 은퇴 전까지 운전을 업으로 삼던 아빠는 칠렐레 팔렐레 헤벌레 하고 다니는 다소 뇌가 순수한(지극히 아빠의 시각) 딸이 안전장치가 들어가지 않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여러 고민을 가족과 함께한 끝에 아주 적당한 차를 구매하게 된 것이니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아빠는 이제 장거리 운전을 피로해하는 체력으로 바뀌었고, 엄마는 면허가 있으나 지금 와서 운전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으며 동생은 운전을 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아빠와 번갈아 운전을 할 자식 중 가장 유력한 사람은 나였다. 거기다 주치의 선생님도 내가 복용 중인 약 중에 차량 운전에 무리를 주는 약물이 없다고도 얘기해 주셨다.

어쩌다 보니 차 구매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새 차를 구매할 때 "그 돈이면... 굳이 지금 왜..."라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보니 구구절절 쓰게 되었으니 양해 바란다. 차는 내 상황에 가장 적당한 모델로 골랐고, 잘 써먹고 있으니 안심하셔도 된다.


또한 직장 생활 10년을 했는데 고작 1년 놀 돈도 못 모았냐 물어본다면 이건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 제일 큰 덩어리는 이 집 보증금에 묶여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다행인 일이다.

이전에도 공황장애로 인해 회사를 여러 달 쉬게 되었을 때도 돈에 관해 걱정을 하며 지낸 적은 없었다. 보증금에 큰돈이 묶여있어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가난하다.

당장 쓸 돈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자존감을 좀먹는다.

시원한 아이스 바닐라 라테 한 잔이 너무 마시고 싶은데 고민하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을 좀먹는다.

친한 지인들의 생일에 생일 선물 하나 보내줄 수 없어 겸연쩍은 마음을 담아 생일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마음조차 내 마음을 좀먹는다.

물론 이 글을 읽고 고작 그걸로 가난하냐, 생각할 수 있다. 그건 상대적인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원래 성격이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도 싫어하지만, 내가 상대방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에 내 삶에 있어 가장 자부심을 느꼈던 지점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부모에게 손 한번 벌린 적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무참히 무너졌다. 고정 생활비가 나가야 하는 시점이 돌아오면 나는 자존감이 다 털린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한다.

"엄마, 이거 보이스 피싱 아니고, 사기도 아니고, 진짜로 갚을 건데."로 시작하는 말을 주절거리면 엄마는 군말 없이 돈을 보내준다. 물론 중간중간 돈이 생기면 바로바로 갚았다. 엄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빌려준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히려 돈을 빌린 내가 다 갚기 전까지 제대로 발 뻗고 잠들지 못할 거란 것을. 어떻게든, 언제가 되었든 책임감을 가지고 빌린 돈에 이자까지 쳐서 갚을 사람이 자신의 맏딸이라는 것을 엄마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본가에 내려갔을 때 이런 마음을 토로한 적 있다.

엄마, 돈이 없는 게, 일을 해야 하는 나이에 이렇게 돈이 없어서 엄마한테 빌리는 상태가 된 게 너무 속상해. 내 인생의 자부심은 부모한테 손 벌 린 적 없이 알아서 잘 사는 자식이라는 타이틀이었는데 그게 무너진 것 같아.


엄마는 말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 너는 지금 회복 중이라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고, 또 돈이 급해 되는 대로 이직하고 나면 겨우 회복된 네 상태가 다시 안 좋아질 거야. 엄마는 지금 네가 점점 더 회복 중인 것이 눈에 보여서 그게 좋아.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니까 엄마는 괜찮아.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힘이 들 때 나를 이해해 주고, 내 상태를 나보다 더 잘 알아주는 사람이 가까이에, 곁에 있다는 것은 복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엄마, 미안해.

이번 달도 좀 빌릴게...

이자 쳐서 갚을게...


가난통이 밀려온 장기 백수의 하소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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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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