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이미 바닥인가
요 근래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싶어서 참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다못해 간식값은 벌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주식에 다시 손을 댔다. 나는 주식으로 돈을 잃어본 적은 없으니까. 지금도 다른 증권계좌에 몇 년간 묵혀둔 종목들은 쏠쏠히 불어나고 있는 중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돈을 잃지 않는 서학개미였던 시절의 나는 제법 번듯한 직장인이었으며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고, 지금의 나는 자율신경계 회복을 위해 번듯하지 못하게 칩거하는 상태라 금전적으로도 쫄리는 상황이었으니 투자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달랐을 것이다.
그렇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무기력 환자의 도파민이 되어 결국 두 달 치의 생활비를 깡그리 싹싹 녹여내는 데에 성공했다. 피해가 크지 않은 것은 다행히도 시드머니가 내 생활비의 일부였기에 가능했다.
급한 생활비는 엄마에게 돈을 빌렸다. 생전 부모한테 손 뻗친 적 없는 자식의 부탁에 엄마는 이유도 묻지 않고 돈을 이체해 줬다.
엄마는 알 것이다. 엄마에게 손을 뻗는 마음이 얼마나 불편할까, 저 성격에 빌린 돈을 갚기 전까진 두 발 뻗고 제대로 잠도 못 잘 성격인 게 자신의 딸이라는 걸.
나는 반년 넘게 운전을 하면서 다른 차에게 피해 준 적이 없었다.
난이도가 꽤 있는 일방통행로에 위치한 우리 집 주차장.
주차를 하려면 길 끝에 가로로 서 있는 아주 비싼 외제차를 잘 피해 가며 후진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주차장 벽에 애꿎은 내 차 앞 범퍼만 연신 긁어댔지, 다른 차량에 피해를 준 적 또한 없었다.
운전 초반엔 주차가 그렇게 서툴렀다.
그리고 나는 내 차가 신차인걸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차에 적응하려면 범퍼가 좀 긁히는 것 정도가 대수랴, 그냥 붓펜 페인트 사서 잘 발라주면 되는 것을.
다만, 타인의 차와 타인을 해지지만 말자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다 기어이 사고가 났다. 약을 받으러 병원에 와 지하 주차장에서 양쪽 창문을 다 내리고 사이드미러를 미친 듯이 도리도리 둘러보며 좁은 틈을 비집고 조심조심 앞으로 뒤로를 반복하며 완벽한 주차각을 만든 순간.
차에서, 그리고 내 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
아주 작게 드르륵, 소리가 났다.
가로로 서 있던 커다란 suv차량의 뒤 범퍼를 긁었다.
심하진 않았다. 연락을 받고 나온 차주도 이 정도면 공업소에서도 큰 수리비를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위로해 줬다.
보험료 할증이 붙는 걸 원치 않아 수리비를 현금으로 드리겠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무슨 정신인지 모를 정신으로 진료를 받고 다시 차를 몰아 집으로 왔다. 어이없게도 주차 또한 완벽하게 성공해 버렸지 뭐람.
현관에 차키를 두고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고 침대에 쭈그려 앉는데, 멘탈이 터지는 것 같았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돈 나갈 일이 또 생기는구나.
기어이 또 나에게 바닥이 여기 더 있다고 알려주는 건가 하는 생각에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지난달부터 바뀐 우울증 약은 효과가 참 좋았으므로.
그냥 왜 자꾸 이런 일들이 겹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했다.
지난 한 달간 나에게 생긴 일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최악의 크리스마스였다. 내가 너무 죽상을 하고 있으니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는 걸까.
물론 나는 불자의 자녀다.
주말에 피해 차주분께 연락이 왔다. 살짝 까진 부분이 있는데 도색을 새로 해야 한다고 하며 비용이 많이 나올 것 같으니 보험 처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오히려 나에게 위로를 해주셨다.
연말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마음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문자를 보고 바로 보험사에 사고 접수를 하고, 피해 차주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드렸다.
만사가 다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별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조차 허울 좋은 말 뿐이었다.
나는 별을 보고자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 아니었다.
그저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1월 초가 되면 이 십년지기 친구들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나는 내 차로 모임의 호스트인 친구네 집에 가고 싶었다. 이런 멘탈로는 대중교통을 타다가 공황이 올 게 뻔했으므로.
내 차로 가는 김에 옆동네 사는 친구와, 내려가는 길에 사는 친구도 태워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돈은 없고 휘발유는 있으니 차로 갈게'라고 말했으나 친구들은 이미 기차여행으로 마음이 설레보였다. 나에게도 휘발유가 더 비싸니 그냥 함께 KTX를 타고 가자 권하며 내 자리를 알아봐 주고 있었다.
옹졸한 마음이 서운함을 느꼈다.
왜 아무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지?
왜 내 선택대신 너희들의 선택을 나 또한 선택하길 요구하는 거야?
설명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번거로웠다. 걱정할 친구들의 마음도 미안했다.
가끔은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그래서 피곤한.
그래서 그냥 공황이 좀 있어서 가지 못하겠다고 설명하고, 모임날 집을 내어주기로 한 친구에게만 대략적인 상황 설명을 했다. 그 친구는 '네가 차로 오겠다고 할 때 공황이겠구나' 생각했다고 하며 나를 이해한다고 했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이제 나는 정말 바닥에 닿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