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러나 미련 없이
본론만 짧게 말해
말할 땐 늘 본론만,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을 짧고 명확하게 한다. 들을 때도 그렇다. 집중해서 상대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그 말속에 담긴 본론(주제이자 명확한 메세지)를 찾으려고 예의주시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글을 쓸 땐 아니다. 이상하게도 어떤 하나의 메세지를 가지고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야기가 길어진다. 한 줄을 쓰면 그 한 줄을 설명하기 위해 세줄이 생기고, 세줄을 쓰면 그 세줄에서 파생된 여섯 줄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기다란 이야기의 타래를 줄이고, 잘라내기 위해 다시 읽고 나면 그 사이로 또 두줄이 비집고 들어간다. 어쩌면 일목요연하게 말을 하기 위해 참고 억눌렀던 말들이 글로써 터져 나오는 게 아닐까. 모든 것은 총량의 법칙이 있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함축과 은유의 세계
긴 글을 쓰고,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막연히 두려웠다. 그래서 시를 썼다. 시를 쓸 땐 한 문장, 두 문장 속에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그 과정이 묘하게 짜릿했다. 어떻게든 더 잘 표현하고 꽉꽉 담아내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마침표를 썼다 지우는 그 과정은 여전히 나를 짜릿하게 만든다. 그러나 점점 그 짜릿함보단 느슨하게 감정의 소회를 풀어내는 날이 자꾸만 늘어간다. 그와 비례하게 반대로 사람들을 만나면 입은 더 단단하게 봉쇄된다. 말을 꺼내려다가도 괜스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어릴 땐 말하기 전에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말해야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 배움을 너무 깊이 새겨버린 탓인지 어느샌가 말하기 전에 네 번 다섯 번을 생각하고 끝내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남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나를 닫아버리게 된 것이다.
매일 잠들기 전, 나는 하루를 되돌아보고 나눈 대화를 곱씹는 버릇이 있다. 아마도 중학생 때부터 심해진 버릇인 듯한데, 이제는 하기 싫어도 머릿속에 자꾸만 말들이 뭉게구름처럼 떠올라 나를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떠오르는 뭉게구름의 양을 줄이기 위해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대화를 나누는 게 인생의 낙이던 시절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이야기를 하면 결국 그게 내 약점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자꾸만 입을 오므리게 되었다. 한 번씩 말을 마구 쏟아내고 싶다는 욕구가 파도처럼 밀려들기도 하지만, 이젠 나름대로 잘 참아낸다. 그리고 참아내기 힘들 땐 글을 쓴다. 그리고 글을 쓰면 조금이나마 답답했던 그 마음이 피융하고 뚫린 듯 개운해진다. 어차피 허공으로 흩어질 말 대신 종이 위에 오래도록 기록될 글이 남았으니 오히려 좋다고 해야 할까.
뭐든 하다 보면 늘고, 안 하다 보면 잊히듯이 어느 순간 말도 자꾸 삼키다 버릇하니 퇴화가 되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엔 무대 위에 서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발표하는 리더의 역할을 즐기고, 여럿이서 있을 때에도 대화를 주도하던 나였으나 이제는 갑자기 몰아치는 생각에 비해 늦어지는 뱉어냄으로 말을 더듬기도 한다. 물론 일상에 문제를 주진 않지만, 나 스스로 사소하게 느끼는 답답함과 이상함일 뿐이다.
지금은 쓰는 시간
부정적인 생각은 그만. 그러니 지금은 쓰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쓰는 시간이 지나면 또 말하는 시간, 소리 내는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 쓰는 시간의 고독과 고요함이 아직은 좋다. 달리기를 해야만 느낄 수 있는 개운함이 있듯이 글쓰기만이 주는 해방감이 있다. 잘 쓰기 위해 잠시 말은 줄이고, 글로 표현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