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늘 방심한 틈을 타 우리를 습격한다.
새로운 여정을 고대하며
그렇게 정신없이 이사를 완료한 뒤, 또 여러 날의 정리와 정돈의 시간을 거쳐 오픈을 이틀 앞둔 화요일. 해가 진 저녁 어두컴컴한 창밖 너머로 불을 끄고, 조명들을 켜보았다. 아직 미완의 상태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을지로에서의 여정을 시작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곳곳을 눈에 담았다. 조명들을 하나둘 끄고, 퇴근.
수요일에는 일정이 있어 별방구에 들르지 못했다. 웬만큼의 정리는 모두 해두었으니 이제 내일 가서 마무리만 하면 되겠다는 가뿐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항상 사건은 하필이면 방심한 그 하루에 벌어지고야 마는 법. 내가 가지 않은 그 하루, 반나절의 시간 동안 별방구가 물에 잠식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알았다면 무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을까.
목요일. 추가로 챙겨갈 것들을 확인할 겸 CCTV 어플을 눌러보는데, 접속이 안된다고 뜨는 것이다. 녹화 기록도 어제 오후 5시쯤으로 끊겨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아님 그냥 인터넷 문제일까 생각하는데 마침 택배 기사님으로부터 문자가 온다. 도착을 알리는 안내 메시지와 함께 첨부된 이미지 파일. 그 속에는 별방구의 문이 너무도 활짝 열려있는 게 아닌가. 분명 화요일 저녁에 나설 때 단단히도 잠근 문이었는데, 도둑이 든 걸까, 아님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서둘러 별방구로 향했다.
3층 야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4층으로 향하는데 희한하게도 적막과 소란스러움이 공존하는 싸늘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3층부터 4층의 계단과 길 곳곳의 바닥이 젖어있다. 4층 경비실 앞에는 여러 경비 선생님들이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계시며, 별방구 앞에는 높은 사다리 두대가 세워져 있다.
별방구 안으로 다급히 들어가 보니 상황은 처참했다. 입구 쪽에 있는 책들과 문구들이 모두 젖어있는 것이다. 선반의 아래쪽에 세워둔 LP판들까지도 모두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뭔가를 생각할 정신도 없이 이걸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순간 멍해졌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경비선생님께 다가가 자초지종을 여쭤보니 수도관이 터져 4층으로 물이 샜다고 말씀하셨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홍수의 핵심 근원지가 바로 별방구의 천장이 되었던 것이다.
대림상가는 1~4층이 상가이고, 5~12층은 아파트로 이루어진 건물인데, 아파트의 수도관이 터졌다는 것이다. 올해 2월, 추위가 가실 듯하더니 갑작스럽게 한파가 몰아친 날이 있었다. 바로 그날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이 건물은 그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터져버리며, 천장은 그 많고도 무거운 물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야 만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에 나는 그냥 망연자실을 해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미화 선생님께서 오셔서는 어제 정말 물이 무릎까지 몰아쳤는데 하필이면 우리 가게로 물이 들이쳐 어떻게는 도움을 주려고 애를 쓰셨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문이 잠겨있고, 나는 새로 들어와서 연락처도 모르며, 당장 눈앞에서 가게는 물에 잠겨가니 이를 어쩌나 하셨다는 것. 어찌저찌하여 문을 열고 나서도 물은 계속 차올라서 마구 양동이와 온갖 도구를 이용해 물을 퍼내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하염없이 감사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옆집 세운나 다방의 사장님이 보여주신 당시의 영상 속에는 정말 상상 이상의 물이 거세게 몰아치는 급박한 상황이 담겨있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은 흡사 폭포처럼 두껍고 거칠며, 종아리 위까지 차오르는 물은 매우 빠르게 파도치며 이곳을 덮쳤다. 그 영상을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상황이 담겨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 다시 안으로 들어와서 곳곳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분명 따사로운 온기가 내려앉을 듯해 보였는데, 지금은 일말의 온기도 없이 검은 물자국이 가득한 물 빠진 수조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천장은 쏟아지는 물을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은 채로 너덜 해져 있고, 책들은 물에 젖어 뚱뚱하고 우글우글해져 있었다. 도무지 뭐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모든 힘이 빠진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일단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우선 바닥 곳곳에 남은 물 웅덩이를 대걸레로 닦아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상수도가 터져서 더러운 물은 아니라고 하지만, 곳곳의 물들은 흙탕물처럼 검고 갈색을 띠고 있다. 그 흔적은 아주 선명히도 남아있어 나는 곳곳을 닦고 또 닦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물의 흔적이 남아있고, 뭐가 멀쩡하고 아닌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전기도 사용이 불가했다. 한파의 여파로 여전히 날은 너무 춥고, 자꾸 찬물에 손이 닿으니 몸은 점점 얼어갔다. 일단은 바닥의 물들만 치운 뒤, 다음날 다시 와서 정리를 이어가기로 했다.
잠식 2일 차. 세세하게 구석구석을 살피니 상태는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포장된 문구들에도 모두 물이 들어차서 물을 빼고, 포장을 벗기고 쓰레기로 분리하는 과정을 하루 종일 해도 젖은 것들은 계속 나왔다. 상품의 80%를 모두 폐기해야 하는 이 현실이 슬프다 못해 암담했다. 눈물을 머금고 이 모든 걸 버리는 과정은 참으로 씁쓸했다.
계동길의 별방구를 떠나오며,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이고 지고 온 것들을 미련 없이 떠나보내게 되는 이 상황의 아이러니. 가구나 소품들을 꾸려가며 천천히 더 들이자는 마음으로 뭔가를 새로 사는 것은 일단 미뤄두었는데, 그 미루기를 시전 했던 과거의 나를 칭찬하게 되는 씁쓸한 위로. 갑작스러운 물폭풍이 몰아쳤음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까지. 모든 게 애써 괜찮다고 이겨내야 하는 상황인 게 나를 더 침울하게 만들었다.
나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이렇게 젖었음에도 삶과 정신에 큰 타격이 찾아오는데, 정말 보금자리인 집이 홍수나 폭우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를 이제야 아주 희미하게나마 공감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왜 사람은 늘 직접 겪어봐야만 그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게 되는 걸까. 너무 잔혹하고도 냉철한 삶의 법칙이다.
이사를 하고 짐을 풀고 공간을 채워간 시간의 두배로 이 모든 걸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서서히 나는 뭔가 에너지를 잃어갔는데, 그건 뭐랄까 새로운 시작에서 피어나는 열정이랄지, 활기랄지, 그런 것들이 검은 물기를 닦으며 그와 함께 하루하루 점점 증발해 갔다. 한동안은 나도 모르게 이곳을 떠올리며, 애정이나 설렘보다는 피로를 더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뒤로 한 채 또 열심히 정리를 하며 시간은 흘러갔다. 점차 서서히 빛을 찾아가는 별방구의 모습을 보니, 처음과는 다른 형태의 활기가 서서히 돋기 시작했다. 젖은 책들은 폐기하거나 열람용 도서로 빼두고, 을지로의 이야기가 담긴 문구들을 새롭게 제작하며 빈 곳들을 채워나갔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작은 구멍들도 차츰 조금씩 채워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별방구가 되었다. 을지로에서의 별방구. 그 여정이 시작되기까지 많은 고됨이 함께했지만 뭐든 순탄할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고, 또 삶이기에. 애써 웃더라도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그냥 보내기보단 잘 보내기 위해 고민한다. 그게 별방구의 존재 이유이자, 전하고픈 마음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외롭지 않게 별방구의 앞을 늘 지켜주시고, 밝혀주시는 경비 선생님과 미화선생님께는 오픈을 알리는 작은 선물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전해드렸다. 지금도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덕분에 별방구를 오고 가는 곳곳이 편안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하다.
추위는 단단한 파이프를 깨뜨리고, 흐르는 물은 견고해 보이던 천장을 뚫고 모든 걸 적셔버렸지만, 별방구의 온기까지 사그라뜨리지는 못했다. 그 강인한 온기와 마음을 담은 별방구는 늘 사람들의 일상과 이상 사이에 머문다. 부디 별방구의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 가닿기를.